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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는 그대로, 단지 내가 변했다

by 소원상자

한때 모든 것이 반짝이던 곳이 있다.

그곳은 지금도 그대로다.

나무는 여전히 바람을 받아 흔들리지만

그곳을 걷는 나의 발걸음만은 다르다.

풍경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빛의 각도도, 바람의 결도, 거리의 냄새까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내가 그 안을 통과하는 방식은 변했다.

예전의 나는 세계를 경험한다고 믿었다.

사물들은 내게 의미를 던져주었고, 나는

그것을 받아 적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속도로 걷지 않는다.

그때는 서두름을 재촉하며 걸었고, 지금은 느리게 걷다 종종 멈춘다.

그때는 모든 것이 새로웠고, 지금은 모든 것이 기억으로 다가온다.

시간은 장소를 고치지 않는다.

벽돌의 틈에 낀 먼지가 조금 두꺼워졌고 그 틈을 바라보는 내 눈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지나쳤던 풍경이 이제는 말을 건다.

"너도 많이 변했구나."

나는 대답하진 않지만 마음속으로 인정한다.

변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 속의 나였다고.

그때의 나는 세상을 향해 달렸고, 지금의 나는

세상 속에 앉아 주변을 둘러본다.

같은 의자, 같은 공기, 같은 시간. 다른 것은

마음의 그림자뿐이다.


그래도 이상하게, 그 변화가 두렵지 않다.

변한 나 덕분에,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것들의 의미가 더 또렷해졌다.

장소는 변하지 않아도, 나의 시선이 자라난다.

그게 성장일까, 혹은 회귀일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의미란 세계가 준 것이 아니라, 내가 세계 위에 덧씌운 것일까.

그러니 장소는 결코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나의 해석, 나의 시선, 나의 ‘나’다.


이제 나는 사물과 나 사이의 거리를 본다.

그 거리가 바로 나의 시간이고, 나의 변화다.

한때 익숙했던 공간 앞에 서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겹쳐 보인다.

둘은 같은 장소에 있지만, 서로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그 간극이, 나라는 존재의 증거이자 한계다.

세계는 고요히 그대로 있고, 그 위를 지나며 흔들리는 것은 언제나 나다.

지금의 나는, 그 진실 앞에 있다.

변한 것은 풍경이 아니라, 풍경을 감당하는

나의 깊이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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