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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네 Jun 10. 2024

00. 게으르지만 예민한 나의 기록

아이폰으로 담은 150,965개의 기억들


‘꽤 게으른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기록에 참 취약했다.


교실 텔레비전에 한글 문서를 띄워두고서 선생님이 써 주는 준비물을 받아 적기만 하면 되는 알림장도 쓰기 싫어했다. 일기는 말할 것도 없이 미뤄서 썼고, 더 이상 일기를 숙제로 쓰지 않아도 될 때가 되었을 때부터는 공책이나 다이어리를 사 본 기억도 거의 없다.


수업을 들을 때도, 시험공부를 할 때도 꼭 필요한 내용만 최소한으로 축약해서 기록했다. 수능을 앞두고 오답 노트를 만들거나 요약 노트를 만드는 것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해 서너 페이지를 넘기는 일이 드물었다.


손에 힘을 주어 글씨 쓰는 게 어찌나 힘들던지. 한때는 너무 일찍부터 샤프 쓰는 버릇을 해서 그런가, 하면서 괜히 도구 탓도 했더랬다. 하지만 돌돌돌 연필 깎아 쓰던 시절부터 글 쓰는 걸 게을리했던 듯하다.



‘꽤 부지런 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곳저곳 다니며 감각하는 걸 참 좋아했다.


길가에 하늘거리며 핀 노란 꽃다지와 돌 틈 사이 난 부드러운 돌나물을 뜯어다 샐러드 해 먹던 봄의 기억. 냇물에서 종이컵으로 피라미를 잡아보겠다며 놀다가, 저녁때가 되면 그 냇물을 퍼다 카레를 끓여 먹던 여름의 기억.

추수가 끝난 논에 짧게 남겨진 벼 밑동과 굴참나무 마른 잎을 밟으면 나는 사그락 사그락 소리에 귀 기울이던 가을의 기억. 잎이 다 떨어져 선명해진 산에 올라 동백꽃 왕관을 만들고 갈대를 엮어 움집을 짓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내 우리의 마을을 만들었다며 즐거워하던 겨울의 기억.


사계절, 그 아래 24 절기를 촘촘히 느끼며 보낸 퍽 풍요로운 어린 시절이었다. 그 덕에 감각적인 자극에 민감한 내가 되었다.


예민하게 느끼지만 글은 쓰기 싫어해서. 나는 나의 순간을 보관하는 방식으로 사진을 선택했다.

보고 있는 것 만으로 벅차오르게 하는 아름다운 것을 봤을 때, 스쳐 지나가게 두지 않고 기억하고 싶은 것들 속에 있을 때. 그럴 때 사진을 찍는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사진은 나에게 감사한 도구 여왔지만, 이제 좀 더 부지런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느낀 바 표현하기 위해 직접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는 노력이 들지 않으니, 핸드폰에서 버튼 클릭 한 번으로 남겨둔 사진은 영원하지만 휘발된다.

비록 그 순간에는 마음을 다했으나, 쉽게 남기면 단편적이고 어렵게 남기면 입체적일 수밖에 없으리라. 쉽게 남긴 것들도 그 나름대로 잔잔하게 스며들어 있음을 느끼지만, 제멋대로 흩어져 있고 또 쉬이 뭉쳐지지도 않아 딛고 서기 어렵다.


여기는 지금까지 담아 가지고 있는 15만 965개의 사진들 중, 몇 개의 순간들을 꼽아 천천히 곱씹는 공간이 될 것이다.

이는 나의 순간들을 온전히 내 것으로 소화해 보려는 나를 위한 노력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다른 누군가에게도 닿아 기분 좋은 기억 하나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프랑스 니스에서 담은 오렌지 빛 건물 사진
나는 강렬한 색감들의 대비가 만들어 내는 활기를 좋아하는데, 거기에 햇살이 더해지면 더할 나위 없다.
아이폰 렌즈는 반사된 햇빛을 번짐으로 담아냈지만 덕분에 내가 느낀 생동감이 잘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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