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패딩턴에게, 21세기에 온 걸 환영해!
"[Opinion] 이 탐험의 시작은 말이야"와
이어지는 글입니다
앞의 글에서 <패딩턴>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탐험에 시작이 있다면, 그 뒤에는 분명 시작과는 다른 끝이 있다. 이 끝맺음은 내가 이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프로듀서 데이비드 헤이먼이 밝힌 것처럼 <패딩턴> 시리즈는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는 힘에 관한 영화 (The films are about the power of embracing people who are different.)”이기 때문에 <패딩턴>은 머나먼 페루를 떠나 온 꼬마 곰 자체를 인정한다. 패딩턴을 바라보는 런던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런던을 바라보는 패딩턴의 시선에 더 힘을 싣는다.
<패딩턴> 시리즈는 ‘타자’로 여겨져 왔던 이(‘곰’인 패딩턴)에게 목소리를 부여한다. 이 부분에서 앞서 논했던 타자화 전략과는 다른,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해당 시리즈에서는 패딩턴이 곰의 언어로 발화하는 모습이 미세하게나마 포착된다. 런던에서 살며 중국어를 배우고 있는 주디가 바로 소통의 매개다. 브라운 가족과 패딩턴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에게 서로가 필요함을 인정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주디가 곰의 언어를 배우는 모습이 짧게 등장하는데, 주디는 진짜 곰처럼 곰의 언어를 잘 구사한다. 이를 계기로 패딩턴이 위험에 처했을 때 곰의 언어로 소통하기도 한다.
또한 탐험가 몽고메리 클라이드는 흑백 탐험 영상의 끝에서 자신이 곰들에게 배운 것만큼 곰들도 자신한테 배운 게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영국 런던으로 돌아가서는 탐험 협회원들에게 자신이 발견한 곰은 미개한 동물이 아니며, 지적이고 교양도 있다고 알린다. 물론 탐험가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협회원 자격을 박탈당하기까지 하지만, 이러한 장면은 서구의 탐험가와 곰의 관계가 상호적이고 대등한 관계임을 암시한다.
영화는 패딩턴의 시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는 ‘눈빛 광선(hard stare)’으로 표현된다. <패딩턴>에서 헨리가 패딩턴의 진실성을 의심하자, 패딩턴은 헨리에게 ‘눈빛 광선’을 쏜다. 그 눈빛을 본 헨리는 쭈뼛쭈뼛하고(Uncomfortable), 열나고(Flushed), 울렁대는(Queasy) 느낌을 받는다. 패딩턴은 이를 ‘무례하고 예의 없는 사람에게 쓰는 눈빛 광선의 힘’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믿어 달라고 말한다. 또한 <패딩턴 2>에서 교도소 주방장 너클스는 패딩턴과 그의 숙모 루시를 함부로 재단한다. 이에 대해서도 패딩턴은 ‘눈빛 광선’을 쏘며 너클스를 화끈(hot) 거리게 만든다. 타자를 주체만의 시선으로 상상하는 것에 대해 패딩턴이 대항적 시선을 던진 것이다.
패딩턴(곰)의 눈빛이 헨리와 너클스(서구인)에게 이상한 느낌으로 다가가는 건 ‘나’ 이외의 ‘시선'이 가시화되며, ‘나’만의 시각에서 세계를 재구성하던 주체는 어떤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러한 힘을 오랫동안 타자로 여겨졌던 ‘패딩턴’에게 돌려준다.
또한 패딩턴이 머나먼 페루로부터 가져온 것, ‘마말레이드’의 기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음식은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설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특정한 음식을 먹거나 먹지 않거나 하는 행위를 통해 한 집단의 경계가 설정되기 때문이다. 같이 먹는 것을 통해 공동체를 규정하고 반대로 같이 먹지 않는 것을 통해 타자를 규정할 수 있다. 머나먼 페루에서부터, 런던까지 패딩턴과 함께하는 마말레이드는 화합을 만드는 변화의 매개로 작용한다.
<패딩턴>은 패딩턴을 포함한 브라운 가족이 다 함께 마말레이드 요리를 만드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패딩턴 2>에서는 교도소 주방장 너클스가 마말레이드 샌드위치를 한 입 먹고, 패딩턴과 함께 마말레이드를 이용한 새로운 요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식당에서 너클스의 폭정 아래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던 이들이 목소리를 낸다. 음식이 다채로워지고 교도소 전체가 변한다.
이렇게 함께 음식을 만들고 먹는다는 것은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환대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그들과의 연대를 가능케 한다. 함께 먹는 이와의 공존과 소통을 상상하게 한다. 함께 먹는다는 것은 결국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함께 먹기'가 더욱 뜻깊었던 것은, 누군가의 시혜적인 태도에서 기인한 게 아니라 (타자로 간주되었던) 패딩턴이 자신만의 고유한 것(마말레이드)으로 만들어가는 환대였기 때문이다.
패딩턴이 자신만의 고유한 것으로 주류 세계에 내는 균열은 긍정적인 변화를 선물한다. 이방인이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가져온 것, 여전히 지키고 있는 근원적인 가치는 숨기거나 버려야 할 것이 아니다. 패딩턴은 회색의 칙칙한 죄수복만 모아둔 세탁기에 잘못 들어간 한 짝의 빨간 양말을 보고, 고작 빨간 양말 하나인데 무슨 일이 있겠냐며 넘어간다. 하지만 실수로 들어간 빨간 양말은 죄수복을 핑크빛으로 물들인다. 핑크 죄수복을 입은 수감자들은 처음에는 패딩턴을 험악한 눈빛으로 바라보지만 결국 그들은 변화한다.
교도소에는 꽃이 만개하고, 수감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어울리고, 벽에는 “PRISON SWEET PRISON"이라는 현수막이 걸린다. 빨간 양말은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 최고의 상황을 만들어낸다. 회색빛 죄수복 더미에 ‘잘못’ 들어간 것 같은 빨간 양말은 틀리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다. 미세한 빨간빛은 회색빛과 섞여 새로운 분홍빛을 만들어낸다. 패딩턴이 가지고 있는 ‘이방인으로서의 고유한 것’은 교도소에, 브라운 가에, 런던에, 미세한 균열과 소음을 낸다. 동시에 기존의 주류 세계 안에서 약동하며 변화를 일으킨다.
과거 탐험 영화에서는 주체가 일방적으로 (타자의) 낯선 세계에 건너와 그 자신의 시선으로 그 ‘낯섦’을 재단했다면, 현재의 <패딩턴>은 타자로 상정되던 이의 주체됨을 포착하려 한다. 하지만 이 또한 완전하지는 않다. <패딩턴>에서 ‘타자’는 인간 외의 모습으로 상상되며, ‘문명’으로 불리는 곳으로 건너와 그 세계에 편입되는 방식으로 재현되기 때문이다. 즉 <패딩턴>은 타자가 가지고 있는 차이를 인정하며 타자를 인정하지만, 역으로 타자의 존재를 강조하는 방식(동물화, 언어, 이름 등)이 차이를 강화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패딩턴>은 인정의 모습을 보이려고 최대한 노력한다. 처음 패딩턴을 마주했을 때 패딩턴을 위험 요소로 간주하던 헨리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갈등하고, 또 화해한다. 종국에는 <패딩턴 2>에서 패딩턴을 비난하는 이웃 커리에게 “패딩턴은 그런 아이가 아니에요. 우리의 좋은 면만 보고 그걸 찾아내는 아이죠. 그래서 어딜 가든 친구를 사귀는 거고 그래서 우리 동네도 더 행복해진 거예요.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패딩턴은 망설이지 않죠. (Well, Paddington's not like that. He looks for the good in all of us, and somehow he finds it. It's why he makes friends wherever he goes. And it's why Windsor Gardens is a happier place whenever he's around. He wouldn't hesitate if any of us needed help.)”라고 말한다.
패딩턴 또한 브라운 가족을 “브라운 씨 가족은 참 특이하지만 그래서 더 좋아요. 완벽주의 헨리 아저씨 정리함, 모든 게 섞여 있는 메리 아줌마 가방, 버드 할머니의 만능 청소 용품들까지. 주디는 언어 천재예요. 곰 말도 잘해요. 조너던은 무엇이든 척척 만들죠. 오래된 장난감들을 새롭게 변신시켜요. 척척박사예요. (The Browns are a curious tribe, but I rather like them. The way Mr Brown arranges his stationery. The strange objects Mrs Brown finds in her handbag. How Mrs Bird has a Hoover for every occasion. That Judy can master any language. Even bear. And how Jonathan can build almost anything using only Mr Brown’s educational old toys. It’s very strange.)”라고 묘사하며 서로를 인정한다. 그렇게 패딩턴은 런던의 브라운 가족과 ‘한 가족’이 된다.
서로는 서로에게 상호 동등한 관계임을. 다르지 않음을, 그렇기에 '가족'임을 보여준다. 물론 <패딩턴>은 앞서 논했듯, 서로의 ‘동일성’ 만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패딩턴은 자신이 브라운 가에 편입된 것에 대해 “닮은 구석 하나 없는 저도 한 가족이 됐으니까요. 겉모습은 다르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저는 곰이니까요. 저는 패딩턴이에요. (Although I don't look like anyone else, I really do feel at home. I will never be like other people, but that's alright. Because I am a bear. A bear called Paddington.)”이라고 말하며 서로의 차이와 고유성을 분명하게 밝힌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 <패딩턴> 시리즈는 이방성과 타자성이 일상이 되는 지금 이 시대에, 많은 물음과 고민을 가능케 한다. 이 탐험의 끝에 남겨진 많은 질문들은 바로 '지금 우리 곁'에 존재한다. 1920년대에 출발한 탐험이 마침내 21세기에 도착했고, 과거에 작별을 고했다. 우리는 이만큼 왔노라고. 이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트인사이트 컬쳐리스트로 활동하며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