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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경 Mar 21. 2023

다른 배움, 다른 세상

이름없는학교 ‘탈가정한 사람들이 정의하는 가족구성권’반 후기

12일 전 10주간의 세미나가 끝났다. 그동안 썼던 매회 후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어 보았다. 2회차 후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가족을 구성할 권리는 가족을 해체할 권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부모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지 못하던 생각이 이어진다. 놀랐다. 나는 여기서 이렇게 솔직할 수 있었구나.      


우리는 이끔이인 타리가 제안하는 책이나 자료를 읽고 돌아가며 발제를 준비했다. 사실 발제를 열심히 듣기보다는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타리는 때로 서운할 정도로 말을 아꼈는데, 정말 꼭 필요한 말만 하는 것 같아서 한 마디 한 마디 새겨듣게 됐다. 사람들과 실컷 떠들고 나면 무언가 배웠다기보다는 수다를 떨었다고 느꼈다. 그런데 나눈 이야기들을 잘 소화하고 싶어서 후기를 쓰게 됐다. 후기를 계속 읽고 싶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계속 쓰게 됐다. 쓰다 보면 내가 무엇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알게 됐다. 이해하고 싶어서 관련된 글과 강좌를 찾았다.      


이 세미나를 경유해, 지금까지와 다른 세상에 살게 되었다고 느낀다. 생각하지 않던 것들을 생각하게 되고, 연결하지 않던 것들을 연결해 생각하게 됐다. 특히 비혼 ‘운동’에 대해 알게 되고 ‘재생산’이라는 개념을 다시 이해하게 된 것, 정치적 실천으로서 ‘퀴어되기’를 알게 된 것이 뜻깊다.  지레짐작했던 것, 안다고 착각했던 것들이 참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알려면 일과 관련 없는 공부를 하는 데 꾸준히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것이었다.      


7주차쯤 됐을 때 나도 모르게 이 모임에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지막 날이었던 3월 9일, 뒤풀이 자리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지금까지 이 모임이 일터를 살아가는 데 어떤 힘이 되었는지 고백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깨달았다. 나는 울지 않았다. 모든 만남에는 이별이 있으니까. 담담해야 한다고, 담담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랬어요, 라고 말하면서 마취된 것처럼 웃었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서로를, 우리를 《가족을 구성할 권리》에 나오는 말을 따서 ‘kin’(상호 호혜적 돌봄을 실천하는 주변인, 대안적 친족 개념), ‘서클’이라고 부르곤 했다. 우리 모임 사람들은 천천히 조심스레 말하고, 또 서로 충분히 말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주제와 별로 상관없는 것 같은 이야기를 해도 어떻게든 연결해서 해석해 주었다. 거칠고 게으른 이야기를 던져도 누군가는 선해해 주곤 하는 것이 감사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가고 싶은지 말하곤 했다. 원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결혼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연결되는 것, 일대일의 독점적 관계를 넘어 더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삶…….      


지금까지 나는 ‘이런 가족은 아니었으면 좋겠다’라고만 생각하고, 어떤 가족을 만들고 싶은가에 대해서는 질문해 보지 않았다. 아니, 가족을 만들기를 포기했다는 게 맞겠다. 나는 포기하는 방식으로 자유를 찾는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포기함으로써 내 시간을 자유롭게 쓰게 됐고, 가족을 포기함으로써 내가 있을 곳을 선택하게 됐다. 자유로워진 만큼 어른들과 단절되어 갔다. 오랫동안 나에게 내 삶은 오롯이 혼자 책임져야 할 것이었다. 내 취약함을 지켜봐 준 몇몇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은 있었지만 앞으로 어떤 사람에게 의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거절당할까 봐 두려웠다고 하는 게 정확하겠다. 그런데 이제 조금 다르다. 누구를 어떻게 돌보며 살아갈 것인지 생각하게 됐다. 아직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나처럼 가족 바깥의 돌봄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 자체가 내적인 힘을 만든다고 느낀다. 우리 모임의 어떤 장면들에서부터 내가 만들어 가고 싶은 가족의 모습을 본 것 같다. 앞으로도 이런 만남을 더 많이 만들어가고 싶다.     


이 세미나에 성실하게 함께한 일은 올해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닌가, 아직 봄이 시작될 무렵이니 그렇게 단정하기는 이른가. 내 스물다섯 살을 이렇게 시작하게 되어 기쁘다. 앞으로도, 앞으로 더 자유롭고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이름없는학교 프로젝트 소개 : https://www.snpo.kr/bbs/board.php?bo_table=bbs_npo&wr_id=8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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