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 활동가다움 원칙 토론회 후기(2)
40일째 이 토론회 경험을 어떻게 남겨야 할지 낑낑거리고 있다. 쓰겠다고 공언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포기하고 잊었을 거다. 약 2주 전 새벽에 글을 올리고 잠들었다가 일어나서 바로 지웠다. 성찰하기를 회피하고 남 얘기처럼 끄적였다는 걸 깨닫고 부끄러워졌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제대로 하려면 내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글을 버리고 다시 쓴다.
앞서 활동가 원칙의 목적 중 하나로 활동가 개인의 출세를 위해 또는 출세에 의해 운동이 사유화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을 다뤘다. 다른 한편의 목적은 ‘고용주’가 따로 없는 구조, 그래서 생계든 역량 강화든 업무 관리든 활동가들이 서로 또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데서 나오는 문제를 조율하기 위함이다. 내게 이 문제는 인생에서 겪은 것 중 제일 어려운 문제다.
스스로, 또 서로 고용하는 직업 특성
좋게 말하면 자율성이 높고 나쁘게 말하면 느슨하고 불안정하다. 해야 한다고 믿는 일을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할 수 있는 만큼, 노동자와는 다르게 업무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받는다. 받는 만큼 일하는 게 아니라, 계속 이 일을 하고 싶으니까 내가 돈을 받을 수 있는 구조를 스스로 만들고 유지시키기 위해 일한다.
아수나로에서 반상근을 할 때 가장 직면하기 어려운 문제는, 일을 대하는 동료와의 관점 차이였다.(반상근 두 명 체제였고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그들과의 경험은 한 결로 꿰어지지 않고 다양하다. 또 이 글에서 지칭하는 동료들은 자원 활동가들을 포함함을 밝혀 둔다)당시 나는 다른 동료들이 충분히 책임지지 않아 내가 역할을 메우게 되는 상황에 크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동료가 자기가 해 보지 않은 역할을 배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자기는 자신이 없다며 나에게 미룰 때, 받는 보상에 비해 일이 너무 많은 것 같다며 하소연할 때 답답함을 느꼈다. 단체 여건상 ‘받는 만큼 일하기’는 불가능하고, 결국 그가 자기 역할을 제한하는만큼 내가 책임져야 할 역할이 커진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털어놓지 못하고 묵묵히 남겨진 일을 했다. 억누른 마음이 언젠가 폭탄처럼 터지리라는 것을 예감하지 못한 채.
함께 책임지기로 결정했던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서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미리 알려 주었다면 맡지 않았을 거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안 알려 주었다’, ‘OO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무리하게 일을 맡은 것 같다’라면서 도리어 나나 다른 동료에게 책임을 묻는 상황을 마주할 때 분노가 치솟았다. 나도/쟤도 혼자서 어영부영 하느라 뭘 어떻게 가르쳐 줘야 하는지 몰랐던 쪼렙인데 어쩌란 말인가, 당신의 내적 동기가 어땠든 최소한 당신도 결정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책임지는 태도를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 하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이야기를 설익더라도 솔직하게 나눌 수 있었으면 더 나은 대화를 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때는 그러지 못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더 활동 경력이 길고 ‘코어’ 그룹에 가까운, 권력자의 억압으로 느껴질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무엇이 누구를 억압하는가
그런 경직된 조직 분위기는 일정 부분 자초한 것이기도 했다. 반상근을 시작하기 전, 나는 어떤 활동가들에게 위계 문제를 제기했다. 내 동기는 ‘가해자로 지목해서 징계받게 해야겠다’가 아니었다. 내가 이 조직에서 끊임없이 느끼는 소외감과 수치심, 의견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미끄러지게 하는 긴장을 털어 놓고 이해받고 싶음에 가까웠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해 당시 대중화되기 시작했던 성폭력의 공동체적 해결과 관련해 이야기되던 언어를 끌어왔고 전략적으로 ‘상처받았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나와 정면에서 갈등했던 한 사람은 내 문제 제기에 대해 ‘청소년이라는 정체성을 이용해 자신을 약자로 위치시키고 비청소년인 자신은 항상 가해자라는 것’으로 납작하게 정의하고 나와 전혀 대화하지 않으려 했다.
이어진 일련의 대처에 실망하고, 조직 내 어떤 다른 사람들이 문제 제기를 신뢰하지 않고 의도를 의심하는 것에 불안함을 느껴 나는 더 경직되고 강경한 언어로 대처하게 되었다. 급기야 다른 활동가의 제안으로 대책위를 열었고, 단체는 내 문제 제기 직후 이미 활동을 그만 뒀던 그에게 활동 정지 1년의 징계를, 그를 비롯한 두 명의 활동가에게 교육 이수를 강제하는 결정을 내렸다. 교육을 진행했던, 내 문제 제기에 공감했던 동료 활동가들은 교육에서 ‘가해자’들이 한 말을 전하며 아무 소통도 이루지 못했다며 절망했다. 아무 것도 변혁하지 못하고 모두를 소진시킨 사건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당시 우리 조직에서 외롭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가 떠난 자리를 채우며 그가 느꼈을 외로움을 절절히 느꼈다. 어떻게 해야 세련되게 효과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모르는 채로,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지적하고 상처 주는 위치에서, 누구보다 외로웠던 사람은 어쩌면 그였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사회 상황과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사건과 다층적인 결정들의 비정형적 결과물인 조직 문화의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만 돌린 것 같다. 우리는 정말 더 나은 대화를 해야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나만의 잘못은 아닐 테지만.
아수나로에서 보낸 시기를 돌아보며 가장 뼈아프게 후회하는 점은, 나와 동료가 한 일에 대해 정직한 평가를 나누지 못한 것이다. 냉정한 평가 위에서 서로가 해낸 것에 대한 상찬도 정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데, 그걸 해내기가 가장 힘들었다. 항상 혼자서는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르지’, ‘나는 왜 이렇게밖에 못하지’라고 자책하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온갖 힘든 척을 다 했다. 정확히는, 스스로를 견디기 힘든 것인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처럼 죄책감을 전가했다. 그 모든 마음을 털어놓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런 맥락에서 ‘활동가의 노동권을 보장하라’라는 외침은 내 언어가 아니다. 두 가지 맥락인데, 하나는 내가 경험하고 목격한 활동가 소진의 핵심은 임금과 노동 시간 등이 아니라 평가와 신뢰의 부재에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고용주가 따로 없고 서로 책임져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운동의 성장은 활동가들의 자발적인 노동권 포기 위에서 이뤄져 왔다. 그걸 자기 착취, 헌신, 희생 등으로 요약하고 싶지 않다.
핵심은 자기 불신과 상호 불신
김승호는 〈민주노총 상근활동가 연구〉(2013)에서 활동가들이 느끼는 어려움을 ‘운동은 하고 싶지만 조직은 그만두고 싶어’라고 요약한다. “노동운동을 한다는 자부심을 느끼고(79.9%), 현재의 조직과 운동의 가치/규범에 깊이 동의하고 있으며(78.4%), 조직을 위해 어려운 일을 할 의사가 있다(88.8%)”는 사람이 다수면서도, 현재의 조직에 속한 미래를 5년 이상 그리는 비율은 19.6%에 그쳤다. 활동을 하면서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은 “입장 차이에 따른 갈등(42.1%)”이다. 조직 문화의 문제점으로는 “활동에 대해 성과나 노력보다는 자기 입장에 따라 평가하는 경향이 있고(48.9%), (…) 소수가 실질적 의사결정을 하는 경우가 많다(60.7%)”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 “자신의 업무에 대한 태도 측면에서는 97.8%가 상당한 책임감을 가지”는 한편 “자신의 업무에 대해 충분한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그렇다는 응답이 63.7%”로 떨어져 열정과 자긍심이 불일치함을 보여 준다. 이는 업무를 수행한 후 평가받을 기회가 없음(46.3%)과 연관된다. 즉 높은 자발성을 매개로 모인 사람들이 정작 자신과 동료들이 어떤 성과를 이루고 있는지 모르는 채 심리적으로 소진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에 강한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자신의 전문성도 동료의 합리성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세대 차이나 개인 간 능력 및 정보 등의 편재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나를 비롯해 많은 문제 제기자들이 표면적으로는 ‘권위자’를 지목하지만, 그 이면에는 ‘나의 역량을 향상시키지 않고 내 기여를 인정하지 않는 조직’에 대한 불만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때로 정돈되지 못한 분노와 책임 전가로 터져 나오는 이유는 스스로도 자신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어느만큼 잘 해 내고 있다는 걸, 내가 언젠가 그처럼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걸 스스로도 확인할 수 없기에 불안한 것이다. 또 반대로 ‘권위자’도 그럴 수 있다. 책임이 버거우면서도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 놓고 넘길 수 없어 내려 놓지 못하고, 남들이 그런 자신을 신뢰하지 않을까 봐 불안해서 더 방어 기제를 세우게 된다. 그렇다. 모두 자기 고백이다.
어떻게 서로의 욕망에 응답할 것인가
토론회에서 진냥은 자신이 생각하는 활동가다움을 ‘욕심’, ‘욕망’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더 좋은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욕망, 다른 이를 착취하거나 착취당하며 살지 않겠다는 욕망이라 했다. 그래서 “우리의 운동을 더 매력적이고 욕망으로 들끓을 수 있도록”, “조직은 활동가들이 다른 활동가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을 예방해야 한다”, “얼마만큼 강제할 수 있는가, 어떻게 통제할까에 초점을 두는 순간 활동가 원칙은 빛을 잃는다”고도 했다. 이 말들을 오래 생각하게 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이 일을 하고 싶으니까 한다. ‘운동을 어떻게 함께 책임질 것인가’라는 논의를 ‘나와 당신의 ‘하고 싶음’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면 더 나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됐다.
이날 사랑방 대용과 민선은 각각 “멋진 원칙을 남기는 것보다 멋진 합의를 만들어내는 관계를 위한 방향으로 에너지를 쏟고 싶다”, “관계를 점검하고 나아지게 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날 이 말들을 소화하지 못했는데,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연애가 그렇듯, 개인의 욕망으로 유지되는 관계는 그 불안정성 때문에 서로를 독점하고 구속하게 한다. 그러나 구속은 신뢰를 배태하지 않는다. 욕망이 한결같을 수 없고 언젠가 조직을 떠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우리가 함께 만든 것을 정직하게 평가하고 무엇을 함께 만들어 갈 수 있을지 서로 묻는 것, 그 관계 맺음 속에 신뢰가 싹트기를 바라며 시간이라는 씨앗을 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청소년운동이 떠나는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라는 이해할 수 없던 문제 제기가 ‘청소년운동 안에서 사람들과 신뢰로운 관계를 맺기 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는 말로 다시 들린다. 그건 아마 떠나 보낸 사람들만의 잘못은 아닐 테지만, 잦은 들고남에 익숙해서 여러 사람들을 두루 살피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시간을 들이지 못했던 우리 문화를 돌아 보게 된다. 그 속에서 들고난 자리를 메우고 지킨 사람의 고달픔을 알기에 하지 못하던 이야기들이 있다.
나는 이 토론회를 계기로, 활동가와 직업인의 경계에서 살고 싶은 욕망을 알아차렸다. 아수나로에서 보낸 도합 6년 여의 시간은 나에게 작지 않은 상흔과 성장을 남겼다. 전업 활동가로 살지 않겠지만 운동에 계속 어떤 식으로든 연대하겠다고 다짐하게 했다. 나의 삶이 앞으로도 어떤 방식으로든 운동과 방향을 같이 하기를 바라게 되었다. 이 욕망을 계속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리고 어떤 관계들을 느리게 조금씩 회복해 갈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etc.
이 글을 오랫동안 신뢰해 온 선배 활동가에게 먼저 보여 줬더니 운동/조직이 구성원의 외로움을 해결해야 한다거나 신뢰로운 관계를 맺거나 챙겨야 하는 게 당위적으로 전제되어 있어 동의하기 어렵다 한다. 그이를 신뢰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결코 의지할 수 없었던 이유를 다시금 깨닫는다. 그의 의지하도록 허락하지 않음은 나를 자율적인 사람으로 행동하도록 도왔다. 그럼에도 나는 상당 기간 일정 부분 그의 목표와 욕망에 동일시하고 사상적으로 의존해 왔다고 느낀다.
활동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타인의 욕망을 내 욕망으로 만들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국가와 자본이 요구하는 욕망의 내면화를 거절하는 것만큼 조직과 멋진 동료에게 자아를 의탁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그로부터 얻는 외로움은 누구도 덜어 줄 수 없는, 내가 더 나은 세상에서 더 나은 삶을 살고자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돌봐도 외로울 것이고 마음의 문제로 갈등을 빚을 것이다. 그렇기에, 실패가 아닌 시도를 남긴다고 생각하며 나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