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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경 Apr 08. 2023

음침하고 우울한 오뚝이

스피치 수업 숙제 "나를 설명하는 말" 수집하기

지인들에게 나를 설명하는 말을 수집해 보았다. 내일 시작하는 스피치 수업에서 지인 10명 이상에게 의견을 듣고 3분 말하기를 준비해 오라는 숙제를 받았기 때문이다.   

  

A | 단감 : 주황색…퍼스널컬러인데+단단하고 부드러워서

B | 낙엽색 : 가을 색깔 옷을 자주 입어서. 느낌도 가을 느낌! 차분+생각많음+현실적+책

    묵묵히 : 묵묵히 뭔가를 계속 하고 있어서! 일도 활동도 연애도 운동도 루틴만들기도 보가 산책도~~ 해야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은 한다! 나는 이미 시작했다! 요런 느낌

C | 꾸준함 : 처음 알게 됐을 때부터 서경은 꾸준히 글 쓰고 여러 사람들 만나고 활동하면서 발전하는 게 멋있어 보여 ㅎ

D | 따스하고 날카로운 : 형용사도 괜찮나?ㅎ 따스한 느낌의 사람이지. 조용조용한 말투, 차분한 음색, 조심스럽게 듣는 모습까지.. 날카로움이 빛날 때가 있는 사람이지. 광주 학생인권조례 공청회 때 조목조목 의견을 밝히며 밀리지 않는 모습, 느슨해져 삐져나오는 잘못을 압정처럼 조용히 찌르며 짚어주는 모습까지.. 따스한 햇살 아래 편하게 누워 골골거리는 통통한 고양이 같달까…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감추고 있는 고양이..

E | 잘은 모르지만 서경님 글보면 되게 섬세하고 깊게 생각하는 사람같아서 부러웠답니다.

F | 신중 : 곰곰히 뭔갈 고르는 모습이 생각나서

G | 천진 : 꾸밈이 없다는 측면에서.

H | 바른 태도, 서슴없는 건강한 질문, 배우려는 적극적인 자세, 그러나 종종 멈칫거리는 내면의 두려움

I | 우울, 불안 : 일단 떠오르는건 그런거인데.. 왠지 미안.. 언제나 잔잔한 우울을 안고 산달까. 근데 그 우울의 맥락을 들어보면 불안감에 근거하는게 많음

J | 음침함 : 항상 혼자 뭔가에 파묻혀 있는 느낌. 요즘은 책.

K | 누나 : 시간이 지나도 항상 누나거든. 내가 누나한테 반말할수 있을까? 음…. 아마 죽을때까지 못할 것 같아. ㅋㅋㅋㅋㅋㅋㅋ 누나가 나한테 오빠라고 죽어도 말 못하는 것처럼! 

L | 오뚝이     


아래는 준비한 3분 스피치.     


학교에 다니면서 다른 학생에게 폭행을 당한 적이 몇 번 있다. 그때마다 무서워서 입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때리지도 못했지만 꿋꿋이 서서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밀쳐지고 발로 차여서 넘어져도 다시 똑바로 섰다. 나중에 울더라도 그 앞에서는 울지 않았다. 덕분에 한 번은 ‘OOO에게 그렇게 맞고도 안 울더라’라며 회자되는 일이 있었다. 한 번은 지켜보던 다른 학생이 ‘뭐야 오뚝이야?’라며 비웃었다. 나는 그 말들에 자긍심을 느꼈다. 네가 나를 함부로 대해도 나는 떳떳하니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는다. 나는 네가 두렵지 않다. 그렇게 몸과 눈빛으로 말했다.     


이번에 친구가 나를 설명하는 말로 제시한 ‘오뚝이’라는 말은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그가 지켜본 나는 아마 일방적으로 맞는 피해자가 아니라, 계속 잘못된 판단을 저지르고 문제 제기를 당하고 소중한 관계를 잃고 번아웃에 빠지곤 하는 좌충우돌 문제투성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다시 해야 하는 일을 한다. 망친 어떤 일을 뒤로 하고 ‘죽는 게 좋겠어’하고 머리를 쥐어 뜯으며 새로운 기획안을 쓴다. 때로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가능한 정직하게 내가 잘못한 것을 가려내려 한다. 사과하지 못하더라도 스스로 알아 두려 한다. 그게 나에게는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웬만하면 헤실헤실하며 살려 하지만 그런 일은 헤실헤실한 마음으로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보통 ‘우울’하고 ‘음침’하다. 가장 자주, 깊이 느끼는 감정은 늘 부끄러움이다. 우울과 고독, 부끄러움이 나를 키워 왔다고 느낀다.(하지만 그만 적당히 느끼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나는 언제나 꿋꿋했을까. 이번에 나를 위해 말해 준 사람들은 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그에 따른 편향을 간과할 수 없다. 나는 그 와중에도 분명 어떤 일이나 관계에서는 무책임하게 도망쳤다. 나만의 잘못은 아니라 해도 그런 기억이, 감각이 내 어떤 부분을 우울 속에 붙잡아 둔다. 어쩔 수 없다. 배가 닻을 내려 두듯, 그 자리를 기억할 수밖에. 그 닻이 너무 무거워지지 않도록 앞으로 더 잘할 수밖에 없다고 가다듬는다.      


‘묵묵히’라는 말 앞에서도 오래 생각하게 됐다. 나는 (정상적인 상태라면) 내 책임을 묵묵히 다하는 편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누군가 알아 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엄지 척을 아끼지 않으며 그의 빛남을 알아 주려 노력한다.(역시, 건강한 상태라면 말이다) 이번에 나를 설명하는 말을 모은 일은 처음에는 부끄러웠지만 뜻밖에 내 노력을 알아 주는 말들을 듣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도 종종 사람들과 이런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다. 일단 말을 써 준 사람들에게 천천히 한 명씩 답장해야지. 내 질문이 어렵고 내가 멀게 느껴져서 말해 주지 못한 사람들을 비롯해 지켜봐 준 모두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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