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모먼트》일부 후기
이 책은 1990년대~200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여섯 명의 페미니스트들이 “왜,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글을 엮은 것이다. 그중 한채윤의 〈페미니스트이기보단,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싶지 않은〉에 꽂혀 조금 이야기해 보고 싶다.
한채윤은 페미니즘보다 퀴어의 언어로 먼저 해방을 맞은 사람으로서, 1997년 당시 레즈비언들에게 여성들만의 페미니즘 운동에 결합하기를 요구하며 게이,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던 분위기 속에서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일 자체에 관심이 없어졌다고 말한다. 그는 당시 “여성 해방이 된다고 저절로 레즈비언 해방이 되지 않을 것이며 동성애자 해방이 된다고 여성 해방이 자동적으로 성취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성 운동 속에서도 이성애 중심주의는 만연해 있었고, 커밍아웃 전까지 ‘페미니스트’는 이성애자를 전제했으며, 그런 상황에서 그는 페미니스트이기까지 할 필요 없이, “레즈비언인 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한 번도 ‘〇〇〇스트’, ‘〇〇주의자’ 등 신념이나 실천을 기반으로 스스로를 정체화해 본 적이 없다. 청소년인권운동 동료들의 지속적인 의문 제기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대학거부자’라고 정체화하기조차 거부했다.(참조 : 대학 못 가는 사람들의 말, 한 선배 활동가는 반농담삼아 나를 ‘샤이 대학거부자’라고 정의한다)후지이 다케시에 대한 팬심을 담아 무단횡단을 하면서 “나는 아나키스트다~”라고 떠들기는 했지만 한 번도 진지했던 적 없다.(참조 : 후지이 다케시(2014), 한겨레, [세상 읽기] “신호등 안 지키기” )
작년에는 이를 두고 애인과 언쟁을 했다. 애인은 당연히 내가 페미니스트가 아닐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수많은 사람들이 프로필란에 “아나키스트 소셜리스트 에콜로지스트 페미니스트……”하는 식으로 한참 동안 나열해야 할 것이며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는 말장난일 뿐이라며 짜증을 냈다. 나는 그냥 웃으면서 화제를 바꿨다. 그때 하지 못한 말은, 내가 그 못지않게 근본적이라고 생각하는 문제들에는 ‘OO이스트’라는 개념조차 정의되어 있지 않다는 거였다.
사람들은 성폭력에 그토록 민감한 데 비해 아동청소년에 대한 체벌 폭력에는 왜 그리 관대할까. 물론 제도나 문화 면에서 계속적인 갱신의 과정 속에 있기는 하지만, 유독 사람들은 다른 폭력보다도 체벌에 관대하다. 고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가르치는 데 매질을 안 하는 게 이상하다”라고 발언하고 문제점을 지적받았지만 사과도 하지 않았다. 체벌 폭력을 가한 적 있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공적 활동을 제한하거나 추모를 축소하는 예를 거의 들어 본 적이 없다.(알기로 단 한 차례, 2010년대 후반에 녹색당에서 한 청소년 당원이 같은 당원인 부친을 체벌 가해자로 제소해 당기위에서 3개월 당권 정지 징계를 내린 적이 있다.) 바로 며칠 전에도 한 중년의 사람에게 공적인 자리에서 ‘나는 어릴 적 교사가 나를 체벌해 준 것에 감사하다’라는 말을 들었다.
사람들이 체벌에 관대한 이유를 생각해 본다. 먼저 1) 오랜 기간 국가가 나서서 민법상 ‘징계권’을 두어 허용하고 방조했던 행동인 점 2) 수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겪어 왔고 때로 공개적·공식적으로 행해졌으며 3) 피해자들이 폭력을 겪을 당시에는 발언력이 없고 가해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나이를 먹어 발언력이 생기고 자립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는 상당수가 문제를 왜곡하거나 외면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당시 한 사람의 영혼에 파열을 남긴 고통의 감각은 희석된다. 피부를 맞대고 나를 돌보았던 부모·교사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에 직면하기는 고통스럽고 지난한 일이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사건의 의미를 축소하거나 경시, 때로 희화화한다. 어른이 된 자신의 가해자성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도 그러한 전략은 효과적이다.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하지 않는 까닭의 가장 근본적인 기저에는 이런 물음이 있다. 페미니즘이 나와 우리에게 다채로운 언어를 제공하고 세상을 보는 관점을 전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 페미니즘이 모두를 해방해 주는 게 맞는가? 출산의 고통과 산전후 우울증, 독박 육아의 문제를 제기하는 언어 가운데서 어쩔 수 없이 아동은 고통의 매개체로 존재한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라는 아름다운 언어, 어떤 환경 속에서 아이를 사랑할 수 없었다는 고백은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아동에 대한 육체적·정서적 학대, 그리고 아동의 정서적 발달 과정을 처참하게 일그러뜨린 일관성 없는 양육 태도의 문제를 담요로 덮듯이 부드럽게 은폐한다. 너무 부드러워서 저항할 수조차 없는 그런 종류의 억압이 있다.
모든 학대 부모를 미투 운동에서 가해자 대하듯 하자는 말이 아니다. 사법적으로 처벌하자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내가 하고 싶은 말은 체벌을 성폭력처럼 심각하게 대하자기보다는 폭력을 대하는 이중적인, 한편으로는 무척 경직된 태도를 점검하자는 것에 가까운데 또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우선 당사자에게 판단을 떠넘기는 게 아니라 ‘어떤 친밀한 관계와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건 학대였다’라고 누구나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세대 대 세대로서 사과하고 사과받을 수 있어야 한다. 법은 개정되었지만 누가 사과했는가? 물론 ‘체벌 거부 선언’ 활동을 하며 만났듯 반성하는 부모 및 교사들이 있다. 그러나 그 폭력을 허락하고 방조한, 때로 적극적으로 교사한 국가는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체벌이라는 과거사의 청산은 각 개인의 도덕성에 맡겨져 있을 따름이다.
오늘날 나에게 “당신은 페미니스트인가”라는 물음은 다른 어떤 물음보다도 당혹스러운 질문이다. 대학거부자 정체성을 거부하는 이유는 여러 마디로 말할 수 있지만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왠지 비겁하게 느껴진다. 몇 가지 단편적인 질문을 두고 페미니스트와 ‘안 페미니스트’로 나뉘어 버린 한국 사회에서 트위터에 ‘#나는_페미니스트다’ 해시태그를 한 번도 올린 적 없다는 사실은 의리를 저버린 것만 같다. 또, 많은 페미니스트들의 자기 갱신 아래 페미니즘은 여성뿐 아니라 수많은 소외된 사람들의 곁을 만들며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음을 안다. 나는 분명 가능한 페미니스트 쪽에 서고 싶다.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왜 그래, 라고 말하기보다 페미니즘의 언어와 결합된 무언가를 함께 만들고 싶다. 그게 꼭 페미니즘이라고 명명되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