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나는 거국적(?)으로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완독 하게 되었다. 대하소설 <토지>를 읽으면서 가장 좋았던 것이 무엇이더냐고 묻는다면, 글로 빚어낸 멋진 풍경과 사람 속을 들여다본듯한 감정 묘사들, 등장인물들에게 닥친 상황을 간접 경험함으로 인생의 큰 진리를 깨닫는 기쁨이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는가, 하며 입이 떡 벌어진 채 그대로 옮겨 적어본 문장들이 수두룩하다. 마음이 동할 때면 옮겨 적은 문장들을 소리 내어 읽어보는데 오늘 유난히 눈길이 가는 문장이 있다.
“물은 건너봐야 깊이를 알고, 사람은 겪어 봐야 알 수 있다.”
이 문장이 마음을 너울너울(<토지>에 흔히 쓰이는 의태어) 흔들리게 한다.
1년간의 휴직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카운트다운을 세듯 복직을 기다리고 있는데, (근무했던)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선생님! 올해 복직하시는 거지요? 복직원을 제출해야 합니다. 서류는.....”
이제 그만 쉬고 일하러 가겠으니 허락해주세요,라고 하는 복직원을 작성해 보내 달라는 전화였다. 드디어 가는구나! 달콤한 휴직을 꿈꿨으나 코로나 녀석으로 혼비백산, 허겁지겁 1년을 후루룩 보내버린 이 기분. 코로나에 1년을 강탈당한 이 기분을 어쩌란 말인가. 이런저런 생각이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생각을 밀쳐두고, 담담히 복직원을 작성했다. 그러다 문득 나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이 떠올랐다.
공립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나는 5,6년마다 학교를 옮겨 다녀야 했다. 아이들도 전학을 오고 가면 마음이 심란하고, 몇 날 며칠은 풀이 죽어 다니듯, 어른들도 똑같다. 전근을 가거나 휴직을 마치고 복귀하는 마음이 참 복잡하다. 출퇴근길을 동행하던 나이 쉰이 다 된 선생님도,
“나는 학교 옮기는 게 가장 부담스러워.”
라고 전해 주셨던 말이 떠올랐다. 나이가 많아도, 자신이 몸 담았던 무대를 옮기는 것은 그만큼 큰 부담인 것이다. 옮겨 가는 사람만큼,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마냥 기대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일까. 누가 오는지 궁금해 못 견디고, 사람보다 소문이 먼저 와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먼저 오는 소문들은 하나같이 좋은 소리가 없다. 몇 해 전 2월 전근 발령이 발표 나고,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다. 어떤 분이 오실는지, 괜찮은 분이 오셔야 하는데, 라는 두려움과 궁금함, 기대감이 얽섞여 있었다. 성격이 보통이 아닌 사람이라더라, 개인주의적인 사람이라더라, 카더라 통신을 타고 도착한 말들은 더욱 궁금증을 자아냈고, 한편으로는 팔짱 끼고, 어디 보자 라며 냉담함 마저 솟아오르게 했다. 두구두구두구, 주인공이 나타나면, 군대 고참 이라도 된 듯한 마음이 자리잡기도 했다. 새로 온 분들과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1년이 지나고 나면, 소문이 하나같이 들어맞지 않았고, 장점 몇 가지는 장착하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제 내가 등장할 입장이 되었다. 코로나를 비껴간 그녀가 온다, 라는 마음으로 나를 궁금해할 것이다. 추위에 살얼음이 얼 듯 마음이 얼어간다. 그러면서도 “사람은 겪어봐야 알 수 있다”라는 글귀에 의지하고 싶어 진다. 얼굴을 마주하고, 하루 이틀을 지내다 보면 없던 정도 생길 텐데, 그 정이 어느 때보다 빨리 모여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소통과 인간관계의 비결은 자기의 마음을 닦는 것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해도 타인을 미워하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섣불리 평가하려 하기보다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교감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178쪽, 유시민 지음>
등장을 기다리는 나부터 이 마음을 품고 있어야겠지. 글을 쓰다 보니 어디서 흘러오는지 알 수 없지만 의욕과 기대감 같은 것이 마음 바닥에 고여지는 것이 느껴진다. 인생은 사람과 사람의 부대낌이 아닐는지. 무겁게만 다가오던 부대낌을 가벼운 기대감으로 바꿔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