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 11-
연휴 끝나고 출근한 지 벌써 3일이 지났다. 깃털처럼 가벼운 토니는 반차내고 어딜 갔던 건지 교통사고로 입원을 하는 바람에 사무실의 찬 바람을 온통 나 혼자 받고 있다. 오롯이 내 몫으로. 나는 이번에는 정말 레알 토니가 너무 부러웠다. 학교도 동구권 유럽에서 나와 한국 물정을 잘 모르는 탓에 회사 일에 적응이 어려움에도 그는 타고난 낙천적 성품으로 업무상 지적이나 나쁜 소리를 모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타고난 재주를 지녔다. 나도 닮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된다. 그나마 그런 토니가 가끔 위로가 되었는데 그도 없는 책상에서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노라니 형벌이 따로 없었다. 진은 여전히 그 회계건 처리로 유럽과 아시아 지사들과 연락하며 진행 중이었고 나한테는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나는 그냥 눈치만 보면서 3일을 지냈다. 그나마 재은은 워낙에 외근이 많아 얼굴 보기도 힘들고 진의 눈치 아닌 눈치를 나 혼자 고스란히 받아야만 했다. 이렇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토니는 얼마나 다친 건지 병원에 일주일은 있어야 하는데 절대로 면회는 오지 말라고 미리 사절 의사를 알려와 아무도 가 볼 수 없었다. 기프티콘만 보냈다. 이런 토니의 교통사고도, 실속 있는 라이프 스타일도 모두모두 부러워 죽겠다. 제발 사무실에서 탈피했으면 좋겠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왜 사무실에서는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일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떤 날은 내 숨소리랑 정수기에서 온수 내리는 소리만 들릴 때가 있었다.
며칠만인가. 진이 뚜벅뚜벅 내 자리로 다가오더니 파티션을 두드리며 내 이름을 불렀다.
-진혜 씨.
-네?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초등학생처럼 큰 소리로 대답했다. 진은 내게 회의실에서 잠깐 보자고 했다. 나는 일어선 김에 따라 가려다 다이어리와 펜을 챙겼다. 나는 쭐래쭐래 진을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진은 문을 살짝 열어 두고 자리에 마주 앉았다. 일련의 회계 서류 관련해서 어떤 오류가 있었고. 그 일들을 처리하는데 나에게 먼저 상의하지 않은 건 자신이 결재권자로서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과 일이 커져서 먼저 일을 바로잡은 후에 나에게 말해 주려던 참이었다고 했다. 나는 그의 너그러움과 배려 깊은 일처리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남자라면 평생 함께 살 수 있을 만큼 듬직하단 생각이 들었다. 진은 내게 무언가 물었는데 나는 다른 생각에 빠져 제대로 듣지를 못했다. 나는 기분이 좋아서 무조건 "네"라고 어린아이처럼 대답했다.
-정말요?
-뭐가요?
-이번에 좀 데미지가 커서 2개월 감봉인데 괜찮겠냐는 건데요?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삼촌 회사니까 짤 리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남들이 볼 때 책임감 있게 감봉처분을 받는 것도 그다지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진이 애쓴 것도 있고.
-그럼요. 대체 손해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손해가 커요. 환차손까지 생겨서 손해가 막심한데 사장님이 선처해 주셨어요. 우리 업무는 신입 때 이런 실수를 한 두 번은 꼭 하게 돼요. 하지만 앞으로는 똑같은 실수는 용납 안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은 나에게 감봉 결재서류를 내밀었다. 나는 냅다 사인을 했다. 진이 이제 나가도 된다는 말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나는 진보다 먼저 일어나며 진에게 말했다.
-오늘 제가 저녁 사 드려도 돼요?
-아, 오늘 선약이 있어요.
-그럼 내일은요?
-내일도요.
-왜요?
-제가 12월에 결혼식이 있어서 준비하느라 요즘 조금 바빠요.
뭐라고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꾹 참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그럼 우린 헤어져요.
-네?
-아니, 축하드려요. 말이 잘못 나왔어요.
이렇게 나의 오랜만의 러브스토리는 해프닝으로 막을 내렸다. 회의실에서 나오다 사무실에 걸린 시계를 봤다. LED조명은 커다랗게 4:44를 깜빡이고 있었다.
내 사랑도 444다!
내 사랑도 죽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