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다시 걸어갈 힘을 준 존재
우울증을 나 홀로 아주 씩씩하게 이겨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멋졌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하다. 어둡고 긴 동굴을 지나는 동안 나는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니 누군가는 혼자였다고 바라봤을 수도 있겠다. 남들은 보지 못했을지라도 내 곁엔 늘 같이 울고, 같이 기도해주며 밤낮으로 나를 지켜주시는 분이 함께 계셨다.
그렇다. 나는 지금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국엔 기독교에 대해 반감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얘기는 하지 말까 고민했지만, 하나님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내 유학생활을 100%로 이야기할 수 없기에 훗날 이 글을 읽어볼 나를 위해서라도 무조건 적기로 했다. 읽기 불편하신 분이 계신다면 넘겨도 좋지만,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챕터라는 점만 알아주시면 감사하겠다. 종교적인 이야기라기보다 외롭고 아팠던 열일곱의 나를 찾아와 살리신 '나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로 생각해주시면 좋겠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나는 교회라는 곳에 가본 적도 없었고, 심지어 우리 집은 불교집안이다. 그런 내가 한국 목사님 댁에서 홈스테이를 하게 된 것이다. 종교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기에 예배에 반감조차도 없었다. 목사님 사모님을 따라 금요예배를 필수로 갔어야 했는데 이상하게 난 '기도'라는 행위가 참 흥미롭고 좋았다. 그리고 모태신앙인 다른 언니 오빠들을 보며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따라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냥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다는 게, 내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있다는 게 좋았던 것 같다. 그렇게 조금씩 내 안에 신앙이라는 작은 씨앗이 심어졌다.
그 씨앗이 '진짜' 신앙으로 싹트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어두운 동굴을 지나면서였다. 나는 누구보다 약을 열심히 먹었고, 매일 밤 10시에 하던 일을 다 멈추고 기도했다. 하염없이 울기도 하고, 가끔은 내 마음을 통보하듯 말하기도 하고, 살려달라고 부르짖기도 했다. 그리고 가족들을 위해, 마음의 안정, 대학 진학 등을 위해 계속해서 기도했다. 기도가 끝나고 눈을 뜨면 1시간 반은 훌쩍 지나가 있어서 시험기간에는 기도를 시작하는 게 부담이 될 때도 있었다.
바로 영화같이 기적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우울증에 걸렸을지라도 아무도 나의 학업을 책임져주지 않기에 나는 공부를 해야 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sophomore (고등학교 2학년) 때는 학업에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다. 마음을 다 잡기도, 최선을 다할 힘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밤 10시 기도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이상하리만큼 공부에 대한 마음이 크게 들기 시작했다. 대학입시를 앞둔 시기라서 그런지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고, 열심히 하고 싶었다. 학교 갔다가 집에 돌아와 약 먹고, 공부하고, 기도하고 - 를 매일 반복했다.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는 꽤나 컸지만, 나의 우울함에 대한 생각은 점점 사라졌다. 그냥 예민하고 치열하게 사는 평범한 수험생이었다. 그 사실이 그냥 그때 나에겐 참 다행이었다. 그저 울면서 매일을 흘려보내는 우울증 환자가 아니라, 치열하게 사는 예민한 수험생이라서 참 다행이었다.
바빠도 기도는 멈출 수 없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의 소통창구였고, 유일하게 내 마음을 제대로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영양제도 잘 안 챙겨 먹는 내가 우울증 약을 부지런히도 챙겨 먹었고, 나의 junior (고등학교 3학년) 두 학기가 전부 끝이 났다. 그 해의 내 성적은 전과목 올 A. 누군가에겐 당연한 점수일 수도 있지만, 그때의 내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불가능해야 했다.
성적표를 확인하고 난 후 금요 저녁예배에 참여했다. 예배 후 예배당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주님 저 올 A 맞았어요. 주님 감사합니다.'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영화 필름이 지나가는 듯한 비주얼이 감은 눈 속에서 그려졌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어서 아직도 신기하고 생생하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내 뒷모습이 보였다. 여러 날을 보여주시는지 같은 자세에 매일 입던 옷만 계속 바뀌고 있었다. '좋은 성적을 받았다고 주님이 내가 열심히 공부한 모습을 보여주시는구나' 하고 조심스레 생각했다. 그런데 더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내 생각이 틀렸다.
그 순간, 눈물이 하염없이 나기 시작했다. 그건 공부하는 뒷모습이 아닌 기도하는 나의 뒷모습이었다. 늘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기도하던 모습.
‘다 들으셨구나. 내 기도를 정말 다 들으셨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계속 울기만 했다. 나는 공부라는 행위에 집중했지만, 주님은 내 기도에 집중하셨다는 것을 너무나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너무 감사했다. 감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감사했다.
나를 공부에 집중하게 하신 것도, 약을 열심히 먹게 하신 것도, 쉬지 않고 기도하게 하신 것도 다 하나님이 날 위해 하신 일이라는 게 너무나도 확실했다. 하나님은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이 어두웠던 길에 내가 혼자가 아녔다고, 하나님이 늘 함께하셨다고. 나를 살린 것은 공부도 성적도 아니고, 기도 그리고 하나님이라고.
이보다 더 확실한 치유가 어디있을까?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떴을 때 나는 어둠에서 나와 빛 가운데 서있었다.
그 후, 방학을 맞아 한국에 나가 병원에 다시 가보니 나의 우울증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고 했다. 이상하게 그 말이 이젠 전혀 신경 쓰이지가 않았고, 그 후로 다시 병원에 가지 않았다. 나는 주님 안에서 더 단단해지고 건강해졌다는 확신이 너무나도 컸기에, 내 삶의 태도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