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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라소라빵 Nov 21. 2022

무한 우주, 티끌 같은 다정함일지라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멀티버스 이야기

멀티버스와 이세계라는 장르가 최근 인기 있는 모티프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영화(콘텐츠) 정말 최고인 걸?'라는 느낌을 주는 작품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나마 '스파이던 뉴 유니버스' 애니메이션 정도일까요?(그마저도 시각적 연출 측면에서 이지만)


그런데 행운스럽게도, 이토록 멀티버스라는 모티프가 줄 수 있는 가슴 따뜻한 울림을 지닌 영화를 만났습니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입니다.


1. INTRO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때론 도움이 된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는 보는 이를 빼놓고서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누군가를 그토록 가슴 저리게, 미소 짓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 원동력은 읽는 이가 겪어온 삶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술가들이란 작품을 보는 이가 밖으로 표출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누구보다 날카롭게 벼려 가슴 깊숙이 찔러주는 사람들이겠죠.


가능성의 우주(멀티버스), 이세계 이야기가 오늘날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최선의 선택과, 결정으로 만들어진 오늘날의 자신이지만, 세상의 등쌀에 이리저리 떠밀릴 때면 그런 내가 한없이 작고, 하찮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밀려오는 후회와 함께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달라졌을까?'라며 다른 선택이나 일상과 다른 비일상을 꿈꾸곤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잠시 팍팍한 현실을 잊고, 목구멍으로 억지로라도 삼키게 해 줄 이야기가 꾸준히 웹툰이나 극장에서 많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바로 '멀티버스'나 '이세계'라는 이름을 단 장르 도식입니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헝가리의 한 속담처럼 그렇게라도 잠시 힘든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기 위해서요.  


텅 빈 베이글의 이미지

영화 속  '조부 투파키'의 베이글 이런 현대인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자신의 실패와 어린 시절의 후회를 빚어 창조했다고 하는 베이글. 마치 가슴 한쪽이 뻥 뚫린 사람 같기도 하고, 무(無)를 뜻하는 0(Zero) 같기도 하며, 빛마저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조부 투파키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베이글 속으로 들어가, 마지막에 찾아올 죽음의 망각에 기대어 벗어날 수 없는 삶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는 조부 투파키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영화 우리도 각자 자신만의 실패와, 후회를 빚어 만든 베이글을, 가슴속에 하나 씩 지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베이글과 계속해서 눈을 마주치다 보면 무력감이 온 정신을 지배하고 , 곧 그 속으로 자신을 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베이글은 한 겹의 커튼으로 가려 무시하거나, 그 속을 채울 무언가를 계속해서 찾아 나서야 합니다. 하루라도 더 이 우주를 살아가기 위해라도.  


그 빈구멍을 메워주기 위해 보통의 다중우주, 이세계를 소재로 한 콘텐츠는 환상적인  비일상의 세계를 준비합니다.  '네가 꿈꾸는 모든 것을 여기에 준비했어. 이 멋진 신세계를 탐닉하면서 잠시 베이글로부터 눈을 돌려!' 이렇게 말해주듯이 말이죠. 마치 어린 왕자의 상자 같은 멀티버스를 마음껏 주무르고 있으면 현실의 고통과 상실은 잊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상자만을 가지고 놀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 장미가 기다리고 있는 고향별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죠. 때문에 에에올이 준비한 멀티버스는 조금 다릅니다.  멀티버스를 모티프로 하지만, 에에올이 주목하는 것은 멀티버스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우주'가 아닌, 우주에 비하면 티끌과도 같은 우리 옆의 존재들입니다.



2. 모든(Everything, Every Where)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거의 없다'와 같다

검은 베이글을 닮은 영수증의 오류 표시

영화 초입부터 보여주는 에블린의 삶은 마치 검은 베이글과도 같습니다. 자신의 20년 인생이 녹아 있는 영수증은 국세청으로 고발당해, 이곳저곳이 오류 투성이라고 친절하게 큰 동그라미 마저 그려져 있습니다. 마치 '너의 인생은 의미가 없어'라는 듯, 가운데가 파인 베이글처럼 에블린에게 현재의 삶은 후회와 무기력함이 가득한 공간입니다. 이제는 그  현실과 마주해야만 하는 순간, 딸과 남편과의 관계도 삐걱거리는 상황에서 '알파 차원'의 웨이먼드가 찾아오며 '에에올'은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을 알립니다. 에블린에게 자신이 놓쳐서 후회하고 있는, 지금과 다른 우주의 최선의 에블린을 보여주면서 말이죠.

가장 성공한 차원의 에블린의 모습 중 하나

에블린이 접신하는 다중우주의 또 다른 에블린들은 우리가 현실을 잠시 망각하기 위해 읽어내리는 여러 콘텐츠와 닮아 있습니다. 현란하고, 눈길을 끌며, 황홀한 광경으로 잠시 비참한 현실을 잊게 만들어 줍니다.  정작 중요한 현실의 문제를 망각할 정도로요. 영화에선 이를 '버스 점프(Verse Jump)라고 이름 붙입니다. 멀티버스를 '버스 점프'라고 붙인 것이 참으로 기묘한 게, 수많은 자아와 그것을 실현시켜 줄 정보를 찾아 넘나드는 현대인을 염두에 둔 작명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가능성에 쫓기고, 때로는 지쳐 현실의 고난함을 잊기 위해 차원(콘텐츠)을 넘나들지만, 그럴수록 우리의 자아는 어디까지가 자신의 욕망이고, 어디까지가 타인의 기대인지 혼란스러워집니다. 조부 투파키가 바로 그런 인물의 전형입니다.


조부 투파키가 되어버린 조이와, 그런 우주적 빌런을 만들어낸 알파 세계의 에블린은 그 어느 우주의 자신들보다 많은 가능성을 품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수많은 목적지(가능성)가 있다고 한들, 정착하고자 하는 항구가 없다면 배는 결코 육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어머니의 기대와 사회의 강압에 기대 시작한 출항이기에, 조이에겐 스스로 정한 정착지가 없는 항해였습니다. '어디든 갈 수 있다.'라는 말은 곧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결국 조이는 망망대해와도 같은 거대한 멀티버스에서 모든 가능성을 이루어낼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도달한 곳은 방향을 잃고 표류해야 하는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입니다. 조이의 자아는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기대사이에서 끝없이 방황합니다. 그럼에도 모든 이들에게 공평히 약속된, 단 하나의 정착지가 있습니다. 바로 죽음. 조부 투파키는 그렇게 자신을 지치게 하는 표류에서 벗어날 방법으로 죽음이라는 마지막 수단을 꿈꾸게 됩니다.


우리가 찾아 나서는 가능성이라는 것도 조부 투파키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조이에게 에블린이 늘 하는 잔소리인 '살을 빼라', '레즈비언 정체성을 아버지에게 알리지 말아라' 등은 사회의 표준에 맞추어진 요구입니다. 그 잔소리도 조이에 대한 사랑에 기반하고 있지만,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선 마치 사이즈가 안 맞는 남의 옷에 내 몸을 끼워 맞추듯 답답함, 숨 막힘을 견디고 나 다움을 숨겨야만 합니다. 사회를 그 기대를 '가능성'이라고 부르지만, 여기에 딱 맞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강압에 떠밀려 수많은 기대와 가능성에 부응하고자 할수록 새로운 조부 투파키는 탄생합니다. 가능성의 우주는 순식간에 종말의 블랙홀로 뛰어들고자 하는 이들로 변모하게 됩니다.


알파 우주의 웨이먼드는 에블린이 지닌 가능성의 힘으로, 조부 투파키가 지닌 허무에 맞서고자 했지만, 극한까지 밀어붙인 가능성은 결국 또 다른 허무가 되어 데칼코마니처럼 반복될 뿐이었습니다. 즉 무한 우주가 지닌 가능성으로도 조부 투파키의 가슴속에 뻥 비어있는 베이글의 구멍은 메울 수 없었습니다. 다른 멀티버스 영화와 달리 가능성이 지닌 힘은 이 우주를 멸망으로 몰아가는 허무를 메울 수 없었습니다.



3.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를 거쳐 만난, 지금 이 순간에 다정함을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우주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조부 투파키를 막아낸 사람은 최악의 가능성을 지닌 주인공 에블린입니다. 알파 우주의 웨이먼드가 보았을 때 특출 난 장점도 없고, 특별한 재능도 없는 사람. 허술한 영어로 세금 신고를 하다, 가족끼리 즐기기 위해 산 노래방 기계가 잘못 접수되어 국세청의 조사까지 받게 된 이민자. 그런데 그녀가 지닌 진정한 무기는 영화 시작부터 관객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베이글 속을 채우는 듯한 가족의 모습


바로 영화가 시작하자 말자 보여주는 노래방 기계로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에블린 가족의 모습. 골치 아픈 사건을 만든 노래방 기계이지만 남편과 에블린의 진실된 재능은 바로 다른 우주의 자신을 소화해내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이었던 겁니다. 현실의 문제가 너무나 벅차서 그렇지 에블린은 본래 남편과 닮아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음을 영화 내에서 몇 번이나 보여줍니다. 실패한 인생의 원인인 웨이먼드를 따라 미국으로 온 것도, 코인 세탁소를 힘들게 운영하며 딸을 낳은 것도, 의절한 아버지가 미국에 건너와도 보살펴 준 것도, 설령 딸이 다중 우주를 멸망시킬 악이라 해도 그 애를 죽일 수 없다고 맞섰던 것도 에블린이 모든 순간, 모든 장소에서 단 하나, 사랑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최악의 에블린과 최악의 남편이 공유하는, 가장 성공했던 알파 우주의 자신들도 가지지 못했던 재능입니다.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친절해야 한다는 것이야. 제발, 친절하게 대해줘. 특히 우리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때."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우리 모두 다정해야 한다는 거야.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 우리가 모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때 말이야"


남편인 웨이먼드는 순진한 사람이지만 바보는 아니었습니다. 지루한 세탁 과정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사람들이 웃을 수 있게 인형 눈을 붙여 놓는다던가, 자신들의 조사하는 국세청의 세무사에게도 미소가 가득한 모양의 쿠키를 건네주는 것. 그가 보인 다정함은 에블린이 다시 영수증을 정리해 제출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실제로 다정함은 다른 사람에게도 선의를 이끌어내는 그의 전략적인 무기였습니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조이의 명령을 따르는 여러 사람에게 에블린의 다정함이란 무기를 빌려옵니다. 다른 차원에서 빌려온 기술들이 아니라.  남편이 장난 삼아 붙이곤 했던 눈알을 이마 정중앙에 붙이고, 악당들에게 다정함을 베풉니다. 폭력에 친절로 응수하며, 싸움이 아닌 화해의 액션을 화려하게 펼쳐 보입니다. 모두가 다정해져서 우주를 가득 채울 수 있도록. 그 혼란마저 이해하고 껴안을 수 있도록.


검은 베이글과 정반대로 가운데는 검고, 겉은 하얀 인형 눈. 마치 다정함이 허무를 채우듯이


그런데 사랑이 조부 투파키의 베이글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모든 가능성을 경험할 수 있는 조부 투파키에게 우주는 '이제 더 기대할 것이 없는' 공간입니다. 모든 걸 알고, 결국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차갑게 식어 멸망할 것을 알기에 합리적인 결론으로 죽음에 이르고자 합니다. 그럼에도 조부 투파키가 주인공 에블린을 찾아온 것은, 필연적으로 찾아올 '죽음'의 우주에서 벗어나 '나를 혼자 두지 말아 달라.', '나를 사랑해 달라.'는 가장 절박한 의지를 표현하고, 자신이 모르는 일말의 기대감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베이글의 빈 속을 채워줄지도 모르는 단 한 명의 사람을 찾아.


그런데 이 베이글의 구멍은 스스로가 채울 수 없습니다. 그게 가능했다면 조부 투파키는 탄생하지도 않았겠죠. 조부 투 파키의 우주를 열고, 누군가가 이 구멍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바로 눈알로 상징되는 다정함만이, 이 구멍을 채울 수 있습니다. 에블린이 경험한 알파 세계가 지닌 것 같은 무한한 가능성이 아니라 바로 다정함이요.  


4. OUTRO 우주마저 건널 수 있는 티끌 같은 다정함을 가지기를


다양한 욕망과 그것이 빚어내는 자아가 꿈틀대는 현대사회입니다. '멀티 페르소나', '부캐' , 'N 잡러'라는 말들처럼 누구보다 저마다의 우주를 열심히 건너는 우리들입니다.  차원을 점프하듯 우리의 자아는 손쉽게 덧씌워집니다. 조부 투파키가 어머니의, 할아버지의 요구에 맞춰지듯이 자신의 욕망과 사회가 주입한 욕망, 타인의 기대 사이에서 끊임없이 충돌하고 공존합니다. 그런데 이 우주엔 자신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우주 역시 동시에 존재해 혼란스럽습니다. 수많은 타인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헤매는 우리의 머릿속이 곧 멀티버스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욕망 사이를 점프(jump)하고 분열하다 보면 변화에 지쳐 우리의 자아를 상실하고 검은 베이글을 빚어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선 타인의 마음에 존재하는 나와, 내 마음에 존재하는 타인을 꺼내 함께 비교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방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조이가 에블린이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것처럼, 상대방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즉 먼저 상대방에게 다가가, 다정함을 건네고 상대방의 다정함을 이끌어 내는 것. 그렇게 서로의 빈틈을 채워주는 관계를 구축하는 것. '손가락으로 핫도그를 먹고 발로 피아노를 치는 우주가 있듯, 우주에서 모든 것이 일어날 수 있어!'라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에 친절을 베푸는 것.  다정함이 빈틈의 채우자 모든 것이 하찮아 보이던 우주는, 모든 것이 중요한 공간으로 탈바꿈합니다. 바로 나의 욕망만큼이나 너의 욕망 역시 중요하고, 그 수많은 가능성을 건너 우연히 우리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요.


때문에 사랑합시다. 사소하고 미미한 것들을. 언제든지 다정함을 베풀 수 있도록. 우주의 거대한 무의미함에 맞서 절망에 굴하지 않고, 사랑을 서로 놓지 않을 수 있도록.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우주와 같은 당신과 내가, 그 수많은 가능성을 건너 여기 함께 있다는 사실을 축복하며, 서로의 베이글을 채울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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