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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라소라빵 Mar 21. 2024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우리 인생의 본업(1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과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의 감상과 해설

"한 작가가 일생동안 진지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그 제한된 수의 모티프를 갖은 수단을 활용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 나갈 뿐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아르헨티나의 작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작가의 말’에서 하루키의 인용

우리 대부분은 타인의 말에 좌지우지되며 살아간다. (직장이든 가정이든) 그렇기에 많은 사람이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작가라는 직업을 동경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여기 한평생을 창작에 몸 담으며 거장의 반열에 오른 두 작가가 최근에 내놓은 작품을 보고 나면, 우리 삶 역시 거장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곤 조그마한 희망을 품게 된다. 그들도 말년이 돼서야 고백한 자기 자신을 나 또한 천천히 알아가는 중이라고.

오늘 소개할 두 작품의 저자 (좌) 미야자키 하야오, (우)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과 애니메이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장의 자기 고백과 같은 두 작품을 소개하며

인생을 하나의 배역에 비유하면, 천 개의 얼굴을 지닌 배우처럼 다양한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대부분은 환경이 허락하는 내에서, 욕망이 이끄는 대로 선택한(혹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가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삶에서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도 수가 제한된다. 무한대의 가능성이 허락되지 않기에, 우리는 그토록 가슴이 먹먹해지도록 미래를 꿈꾸고 자기 자신에 대해 고뇌하는 거겠지. 


그럼에도 선택은 필연적으로 후회를 낳는다. 그 선택이 수많은 고민을 거듭해 내린 최적해라고 해도. 그래서 수많은 선택을 거쳐 거장에 이른 이들이 커리어 말년에 내놓은 작품이 절절한 자기 고백인가 보다.


서두가 길었지만, 이번 글을 기획하게 된 계기는 하루키의 신작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하 ‘도불벽’)이다.  도불벽을 읽으며 왠지 모르게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하 그어살)가 떠올랐다. 소재부터 이야기까지 전혀 닮은 점이 없어 보이는 두 작품이지만  곱씹을수록 작품의 근원이 같아  보여 기묘하게 느껴졌다.


먼저 두 작품의 공통점에 대해 스스로 느낀 바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두 작품 모두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하고 창작자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품고 있다. 창작자에 주목하면 두 작가 모두 같은 모티프를 여러 이야기로 풀어내는 점도 비슷하다. 하야오가 반전과 반문명을 창작의 주된 모티프로 삼는다면 하루키는 개인주의와 페티시, 그리고 상실을 모티프로 많이 채택한다. 1940년대 일본에서 태어나 자신의 분야에서 거장의 자리까지 오른 뒤 커리어 말기에 내놓았다는 작품 외적 배경 역시 비슷하다. 


따라서 이 두 작품은 창작자 개인과 심상에 대한 수많은 은유가 담겨 있다. (그러니 보는 사람마다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그러나 작품에 녹아든 수많은 메타포를  벗겨내 보면, 거기엔 또렷하게 물음표를 던지는 거울이 관객(혹은 독자)을 바라보고 있다. 


* 각 작품이 수많은 은유와 메타포를 품고 있는 만큼 1편에선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을 중심으로, 2편에선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소개하며 글을 이어가고자 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삶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자신의 애니메이션 작업을 뒤돌아보는 회고록 같은 영화다. 평생 애니메이션을 그리며 좇았던 꿈과 고뇌, 그리고 일본인으로서 시대의 변화를 마주하며 떠오른 의식을 작품에 녹여냈다.

상상력의 세계를 쌓듯, 애니메이션을 그려낸 하야오

하야오는 애니메이션에 꿈을 담았다. 현실과 분리된 탑의 세계에서 고고하게 세계를 유지하는 영화 속 큰할아버지처럼, 상상력의 세계를 심혈을 기울여 만들고 다음 세대를 위한 메시지를 다듬었다. (앞서 소개하듯, 작품에 담기는 메시지는 주로 전쟁과 문명에 대한 경계이다. 아마 1940년대에 태어나 원폭과 전쟁을 경험하고, 경제성장으로 문명화되고 개인화되는 일본을 바라보며 하루키가 느낀 감정이 작품에 나타나는 게 아닐까?)

본래의 생태와 거리가 멀어진 비둘기들

'그어살'에선 꿈속 세계의 앵무새들이 반전과 반문명의 메타포를 담고 있다. 비둘기들은 문명화되는 과정에서 고기를 대량으로 섭취하고 거대한 몸집을 얻었다. 또한 지나친 잔인함과 폭력성을 지니는 타고난 천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본래의 작은 앵무새를 '조상님'이라고 부르며 동경하지만, 지금의 문명사회를 포기할 생각은 없다. (현대사회우리들처럼.)



하루키의 자아를 나눠 담은 캐릭터들

그러나 그가 애니메이션으로 후대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몇 가지 모순을 품고 있다. 심지어 그가 꿈을 담고자 하는 애니메이션조차도.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들려주기 위해선 상업적 성공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니까. 그 모순과 꿈을 '그어살'에선 본인이 대입된 여러 캐릭터들이 나눠 품고, 마치 스스로와 대담을 펼치듯 이야기를 풀어낸다.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 하야오의 자아를 품은 큰할아버지

먼저 ‘큰할아버지’는 애니메이션 감독이자 노년의 거장인 하야오를 대변한다. 큰할아버지는 애니메이션을 그리는 본인의 직업처럼 꿈속 세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애니메이션이라는 꿈의 세계를 그리듯 탑 속 세계를 가꾸며 다음 세대가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지만, 꿈의 세계는 현실회피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마치 애니메이션이 방구석 오타쿠를 양산하는 데 일부 기여하는 것처럼. (그는 여러 다큐에서 소개되듯 방구석 오타쿠에 대해 날 선 비판을 가한다.) 

그래서 ‘그어살’의 큰할아버지는 세계를 유지하고 조정하는 현인처럼 그려지기도 하지만, 닫힌 세계 속에서 현실을 외면하는 소극적인 인물처럼 비치기도 한다. 큰할아버지가 결국 꿈속 세계를 이을 후계자를 찾는 데 실패한 것처럼, 하야오도 지브리를 이을만한 후계자를 찾는데 실패했다는 점도 흥미로운 공통점이다.


하야오의 어린 시절과 모순을 대변하는 캐릭터 마히토

작중 주인공인 ‘마히토’는 하야오의 어린 시절을 모티프로 만들어진 캐릭터로 알려져 있다. 마히토의 아버지가 전투기를 만드는 일을 하는 것처럼, 하야오도 전쟁의 수혜를 입은 부유한 집에서 자라났다. 하지만 하야오 외에도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는 관객들에 해당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마히토는 아버지의 빠른 재혼의 이유를 눈치챌 정도로 섬세한 아이다. (친어머니의 여동생인 새엄마가 그토록 빠르게 아이를 가진 이유는 어머니가 사망하기 전에도 불륜 관계를 가졌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그런 섬세한 아이이기에 마히토가 시골 학교로 전학 온 뒤, 또래가 부린 텃세와 차별에 받는 상처는 더욱 깊다. 그 분노는 자기혐오로 표출되고 스스로 옆머리를 돌로 내려쳐 큰 상처를 남긴다. 그 상처가 남긴 흉터를 가리키며 마히토는 '자신의 악의’라고 큰 할아버지에게 설명한다.

마히토는 자신의 흉터를 더듬으며 '악의'를 품고 있는 자신은 이 세계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마히토가 말하는 악의는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세상의 불합리함을 알아차리는 섬세함, 그럼에도 그 불합리를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분노. 그리고 범인을 친구들로 지목하며 크게 혼내주겠다는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으며 이용하는 자신에 대한 자기혐오도 포함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하야오의 자기 모순을 그려낸 영화 '바람이 분다', 그리고 전투기에 대한 애호를 엿볼 수 있는 '붉은 돼지'

하야오도 마히토처럼 ‘악의’를 지니고 있다. 하야오도 타고난 감수성으로 전쟁과 문명이 세상이 남기는 상흔을 깨닫곤 반전과 반문명을 작품의 모티프로 삼았지만 밀리터리, 즉 전쟁의 도구인 전투기에 매혹되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하야오는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선택할 수 없었던 환경이 일으키는 모순도 자기혐오를 일으키는 원인이다. 마히토가 시골의 텃세에 불합리함을 느끼는 건 그가 잘 교육받고 자란 부유한 도시인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을 괴롭힌 아이들을 혼내주겠다는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으며 이용하는 자신에게 자기혐오를 느낀다. 하야오 역시 전쟁에 반대하는 작품을 그리지만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서 전쟁에 수혜를 입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애니메이션을 그릴 수 있었다.

왜가리와 탐험하는 꿈속 세계는 언뜻 보면 아름다워 보이지만, 잔인한 현실을 품고 있다.


마히토가 하야오의 젊은 시절에 대입된다면, 마히토가 왜가리를 따라 들어간 꿈속 세계는 꿈의 세계인줄로만 알았던 애니메이션 업계에 해당한다. 


 ‘나를 배운자는 죽는다.’


어머니를 찾아 들어간 꿈속 세계에서 마히토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문장이다. 철문에 적힌 요상한 글귀처럼 그가 마주한 탑 속 세상은 결코 이상향이 아니었다. 그곳에서도 배고픈 펠리컨들은 삶을 위해 치열하게 사투하며 적자생존을 이어간다. 마치 하야오가 꿈을 품고 입문한 애니메이션 업계처럼.


 하야오가 애니메이션에 입문하며 본 것은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만 하는 업계의 상황이었다. 펠리컨은 


‘이곳은 저주받은 바다로 자신들은 물고기가 얼마 없어 최대한 높은 곳에까지 날아 이곳을 벗어나보려 했지만 벗어날 수 없었고, 젊은 펠리컨들은 나는 법을 잊어버렸다.’


라고 말한다. 아마 하야오가 애니메이션 업계를 오랫동안 바라보며 느낀 절절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좌) 왜가리 남자의 모티프가 된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파트너 스즈키 프로듀서, (우) 작중에서 생존하는 법을 가르쳐 준 할머니

그러나 생존하는 법을 가르쳐준 이들도 있다. 왜가리 남자가 꿈속 세계를 안내하듯 애니메이션 제작에 항상 큰 도움을 주는 스즈키 프로듀서(인터뷰에서 하야오는 스즈키 프로듀서를 모티프로 삼아 왜가리 남자를 만들었다고 밝힌다.), 물고기 잡는 법과 해체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할머니처럼 업계에서 자신을 이끌어준 선배들. 꿈속 세계에서의 여행은 마히토(하야오)가 자신을 알아가는 여행이기도 하지만 하야오가 애니메이션 업계를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헤쳐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어살'을 관통하는 이야기는 하야오가 살아온 삶과 그 속에서 느낀 자기 성찰이다. 그러나 '바람이 분다'에서 처럼 자기모순에 대한 변명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이제는 자신의 모순을 외면하는 단계를 거쳐, 자신의 삶을 수용하는 단계에 이렀다. 


‘그어살’에 그려진 여러 갈등과 모순들은 하야오가 꿈을 그리며, 그리고 스스로를 탐구하며 느낀 고뇌이지만 모든 관객이 살면서 감당해야 할 고뇌이기도 하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꿈과 욕망, 거기서 소용돌이치는 자기모순과 자기혐오를 품고 인생이란 항해를 떠나니까. 그래서 그는 이야기꾼으로서 작품으로 다음 세대에게 묻는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꿈이라는 조각을 슬며시 후대의 손에 남기며.


※다음 편에선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대한 감상과 총정리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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