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과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의 감상과 해설
누구나 가슴속에 어린 시절에 세운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가지고 있다.
그 도시에서 우리는 자신과의 합일을 이룰 수 있을까?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과 애니메이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편에서 다룬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설에서 이어집니다.
“가끔 내가 무언가의, 누군가의 그림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너는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듯 말한다. “여기 있는 나한테는 실체 같은 게 없고, 내 실체는 다른 어딘가에 있어.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언뜻 나처럼 보여도 실은 바닥이나 벽에 비친 그림자일 뿐……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p.111
플라톤은 세상을 동굴과 그림자에 비유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마치 동굴에 비친 그림자와 같기에, 태양이 비추는 진짜(이데아)를 찾으러 동굴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그렇다면 우리의 본질은 그림자가 아니라 동굴 밖에 있는 걸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어린아이들이 곧잘 따라 하는 소꿉놀이처럼 우리의 자아는 수많은 타인을 기워 만든 조각보이기에, 동굴 밖에 있는 본질도 그림자와 별 다를 바 없을 거라고.
게다가 나이 들며 새로운 조각을 덧붙이느라 어린 시절에 엮어낸 조각은 점차 색이 바래기 마련이다. 마치 퇴적이 동시에 침식의 과정인 것처럼, 쌓이는 만큼 깎여 사라지는 것들이 존재하니까. 하지만 침식된 어린 시절의 꿈과 열망은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위 질문에 대해 하루키가 내놓은 답이다. 하루키가 신인 소설가였던 30대에 쓴 단편을 사십 년이 지나 장편으로 고쳐 쓴 소설이기에, 글이 간직하고 있던 젊은 시절을 노년이 된 자신이 되돌아보는 듯한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1편에서 하야오의「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등장하는 주요한 모티프를 정리한 것처럼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등장하는 주요한 모티프에 대한 개인적인 해설과 주관을 덧붙였다.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도시는 사방이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도시에는 시간이 없다. 시계에도 바늘이 없다.
도시에 들어가려면 내 그림자도 버려야 한다.
도서관에는 책 대신 사람들의 꿈이 놓여 있다.
나에게 주어진 일은 그 꿈들을 읽는 것이다.
_「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비밀의 도시에 대한 설명
책의 제목이기도 된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는 논리적인 인과를 초월한 기이한 곳이다. 하지만 여느 하루키의 소설처럼 논리적인 인과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하루키는 언제나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생생한 감각을 덧붙여 자신이 느낀 바를 이야기했으니까.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는 소설의 주인공이 소년시절 첫사랑과 함께 상상한 가상의 무대다. 그렇다면 그 시절 품었던 꿈과 감정, 지층처럼 축적된 다양한 이야기의 총체가 바로 '오래된 꿈'의 정체가 아닐까? 그래서 도시의 시간은 항상 멈춰 있고(어린 시절에 고정되어 있고) 도시는 '나'가 오래된 꿈을 읽지 않고는 유지될 수 없다.
그러나 어른이 된 나는 어린 시절과 똑같은 감정으로 오래된 꿈을 읽을 수 없다. 삶은 시간의 퇴적이면서 동시에 침식의 과정이기도 하니까. 어른으로서 자아가 쌓이는 만큼 어린 시절의 나는 점차 침식되며 옅어져 간다. 그래서 '나'는 오래된 꿈에 담긴 감정을 꺼낼 수 있지만, 그 내용을 정확하게 해석하지는 못한다. 그저 대략적인 뉘앙스를 알아차릴 뿐.
어른이 된 '나'는 더 이상 17세의 어린아이가 아니기에, 오래된 꿈을 바탕으로 유지되는 이 도시에 들어오기 위해 반드시 한 가지 의식을 거쳐야 한다. 바로 자신의 그림자를 떼어놓는 것. 마치 조각보에서 덧붙인 조각을 떼어내듯, 현실에서 퇴적된 시간을 털어내고 어린 시절의 원형에 가까워져야 이 도시에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도시에 들어오기 위해 떼버린 그림자는 며칠이 지나면 소멸하고 이 도시에서 나갈 수 없게 된다. 어른이 된 '나'가 현실을 외면하고 어린 시절의 꿈에 매몰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듯이. 그래서 ‘나’의 그림자는 '나'에게 계속해서 경고한다. '나'가 밖에서 만난 첫사랑 역시 이 도시에 존재하는 그녀의 그림자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기 때문에 그림자가 사라져 떠날 수 없어지기 전에 이 도시에서 나가야 한다고.
'나'는 결국 그림자에게 설득되어 이 도시를 벗어날 출구를 찾는다. 그러나 출구 앞에서, '나'는 이 도시를 떠날 수 없었다.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오래된 꿈'을 읽는 일을 저버릴 수도, 그녀를 이 도시에 남겨 둘 수도 없었기에. 그래서 '나'는 그림자만 현실로 내보내고, 본인은 꿈속 도시에 남기로 결정한다. 마치 어린 시절의 꿈과 이별을 유보하는 것처럼.
그러나 결심을 하는 순간 '나'는 현실 세계에서 눈을 뜬다. 눈을 뜬 자신이 그림자인지, 아니면 본체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채로.
합일을 이뤄가는 소설가의 자아들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어린 시절의 꿈을 형상화한 곳이라면, 2부에서 '나'가 만나는 인물들은 '나'와 하루키의 상징화된 자아의 파편들이다.
1. 옐로서브마린 소년
옐로서브마린 소년은 어린 시절의 하루키처럼 어딘가 사회성이 부족하고, 책에 파묻혀 사는 소년이다. 어린 시절의 하루키가 수많은 책을 탐독하며 소설가의 양분을 쌓았듯, 옐로 서브마린 소년도 수많은 책을 읽는다. 그렇게 자기 내면의 도서관에 책을 빼곡히 채웠을 때쯤 옐로서브마린 소년은 우연히 '나'가 얘기하는 도시의 얘기를 듣고 그곳으로 떠나고 싶어 한다. 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만족하던 소년은 이제 자기 내면이 들려주는, 꿈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키에 대입하면 이야기꾼, 즉 소설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나'가 도시에 들어오기 위해 그림자를 버렸듯이, 옐로서브마린 소년은 육체라는 허물을 버렸다. 어쩌면 어린 날의 기억은 여러 매개를 통해 가까스로 끌어오더라도 그때의 감각만은 또렷이 기억할 수는 없으니 적절한 비유일지도 모른다.(그래서 그 감각을 그나마 또렷이 남길 수 있는 글이라는 매체가 매력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옐로서브마린 소년은 어른이 돼버린 '나'와는 달리 오래된 꿈이 들려주는 감정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감정을 껍질 밖으로 이끌어 내지는 못한다. 그 감정을 매끄럽게 이끌어내는 건 어른이 된 '나'의 역할이다. '나'는 오래된 도시로 찾아온 소년과 하나가 됨으로 오래된 꿈을 더욱 잘 읽어낼 수 있게 된다.
“저는 잘 이해할 수 있어요. 그들의 이야기에 담긴 의미가 제 안쪽을 하나하나 또렷이 통과해 갑니다. 책의 활자를 더듬어가듯 명료하게. 대신 저는 아직 그들을 껍질 밖으로 능숙하게 이끌어 내지 못해요. 그건 지금으로선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쯤 되면 짐작되듯, 옐로서브마린 소년은 '나'와 하루키의 어린 시절을 대변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옐로서브마린 소년은 어른이 된 '나'보다 오래된 꿈을 더욱 잘 읽어낸다. 그가 바로 어린 시절의 원형과도 같은 존재니까. 그러나 어린 소년은 오래된 꿈에 담긴 이야기를 능숙하게 이끌어 내진 못한다. 이야기를 끌어내는 작업은 마치 소설 쓰는 작업과 같기에, 그 부분은 어린 만큼 미숙하다. 그래서 소년은 어른이 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나'와 옐로서브마린 소년이 합일하는 과정은 하루키가 실제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쓰는 과정과 닮아있다. 이 책 역시 젊은 시절의 자신이 쓴 소설을 완숙한 지금의 하루키가 고치면서 완성되었으므로.
소설을 쓰는 과정뿐만 아니라 우리는 수많은 일에 침식되어 가는 오래된 꿈과의 합일을 필요로 한다.
2. 고야스 관장
앞서 언급했듯, 한 인간의 자아란 온전이 홀로 존재할 수 없다. 필연적으로 주변 사람과 환경을 닮게 된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유령처럼 묘사되는 고야스 관장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현실세계의 '나'에게 도서관을 물려주는 사람이자 때때로 중요한 조언을 건네주는 인물이며 옐로서브마린 소년을 도서관에서 정성스레 돌봐준 인물이기도 하다.
마을에 도서관을 마련한 그는 마치 소설가가 자라날 양식을 마련한 선대의 작가들이자, 소설이라는 장르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온 여러 인물들의 총합처럼 비친다. 그래서 고야스 관장은 이미 죽은 사람이지만 도서관을 매개로 잠시 나타나 ‘나’와 대화할 수 있고, ‘나’는 그의 흔적(도서관과 묘비)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에게 말을 건넬 수 있다. 하루키로 치면 나쓰메 소세키, 피츠제럴드 등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선배 문인들이 되려나? 옐로서브마린 소년은 역시 고야스가 가남긴 도서관을 통해 자신만의 도서관을 내면에 만든 후에야 자신의 오래된 꿈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즉 흥미로운 계승관계로 이어진 세 인물, 옐로보트 소년과 '나', 그리고 고야스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하루키인 셈이다.
벽의 도시와 이별, 그리고 소년은 소설가가 된다.
이 소설의 '나'처럼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벽이 있다. 벽은 수많은 의미를 지녀 딱 하나의 개념으로 치환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이 소설을 읽으며 독자가 생각한 '벽과 도시'에 대한 생각 모두가 정답일지도 모른다.
“그래 달리거라. 벽이 말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웃었다. 얼마든지 달려가려무나. 나는 언제나 거거 있을 테니.”
“듣지 마요”
그림자가 말했다.
“두려워해선 안 돼요. 앞을 향해 달리는 겁니다. 의심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믿고”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p207
현실에 속하는 그림자는 벽을 '나'를 가두는 장치로 보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어른이 된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가야만 한다. 그 과정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호수로 뛰어내리는 것처럼 공포와 위협이 서려있지만, 그럼에도 벽을 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러나 도시를 나와서도 '나'는 계속해서 벽으로 둘러싸인 그 도시를 떠올린다. 어린 시절과 분리된 자아는 존재할 수 없으니까. 가슴에 가시처럼 박힌 첫사랑의 기억처럼 어린 시절에 품은 감정과 그 열량은 어른이 되어 무뎌지더라도 분명 그 도시에 남아 있다. 다만 벽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접근하기가 어려울 뿐.
벽은 어른이 된 우리가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연약한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방어수단이기도 하다.
'얼마든 달려가려무나. 나는 언제나 거기 있을테니'
벽이 말하는 듯한 위의 대사는 '너의 한계는 여기까지야'라고 규정하는 듯이 들리기도 하지만 '나는 항상 이자리에 있을테니 언제든 기대어도 좋다.'라는 뉘앙스로 들리기도 한다. 벽은 무언가를 가두는 수단임에 동시에 무언가를 지키는 수단이다. 옐로서브마린 소년과 같이 섬세한 유년기엔 더욱 이 벽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벽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능숙하게 숨길 줄 알게 된 것뿐. 커피숍의 그녀처럼 모든 어른들은 한 꺼풀 겉옷을 벗겨보면 철판으로 된 속옷 같은 벽이 단단하게 내면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 어느 때가 되면, 어린 시절에 간직했던 그 감정들의 정체를 완벽히 이해하는 순간이 온다. 마치 옐로서브마린 소년과 하나가 되어 오래된 꿈을 읽는 것처럼. 그리고 그때가 되면 어느 날 갑자기 소년이 ‘나’에게 이별을 고하듯 그 모든 기억을 벽의 도시에 남겨두고 떠날 수 있게 되는 순간이 온다.
나는 그 자리에 혼자 서서, 그녀가 남기고 간 존재의 흔적을 오랫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아름다운 모습이 점점 옅어지고 완전히 지워져, 남은 공백을 무(없을 무)가 메워버릴 때까지._-759P
'그어살'과 '도불벽'은 작가 자신을 대변하는 여러 캐릭터가 등장해 자전적인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많다. 그리고 두 작품 다 모호하지만 명쾌한 답을 내려주지 않는 점이 오히려 마음에 든다. 모두가 똑같지 않은 삶을 살기에 각자 다른 내면의 세계를 품고 있으니까.
하루키의 인생은 소설이었다. 그래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마치 예술을 창작하는 과정에 대한 변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옐로서브마린 소년처럼 꿈의 도시를 꿈꾸기 시작하고 꿈을 잊을 법한 어른이 되었을 때 '나'는 내면의 소년을 다시 만나 합일을 이루고, 한 세계를 떠나보낸 후에야 완전한 작가가 되었다.
누군가는 인생을 소설에 비유해 읽고, 쓰고, 다시 읽고 버리는 과정의 연속이라 했다. 마치 이 소설의 '나'가 벽의 도시를 만나 오래된 꿈을 읽고, 어린 자신과의 합일을 이룬 후에야 도시를 망각의 저편으로 보내준 것처럼. 이 책을 읽으며 어린 날의 열망과 꿈, 부끄러운 수치들까지 목구멍에 차올랐다. 몇몇 기억들은 이제 그 이유와 인과까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지니고 있는 여러 감정들마저 이해하게 될 때면 지금의 나는 옅어질 질지도 모르지만, 그때의 나는 나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앞으로 수많은 역할과 세계를 거쳐가더라도
자기 자신을 알아 간다는 숙제를 꾸준히 이어갈 수 있기를
-P.S-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과 애니메이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지켜보며 두 거장의 인생사를 압축하여 지켜본 기분이 들었습니다. 누가 되었던 자기 수용의 단계를 거친다는 점이 흥미로웠죠. 부족한 게 없어보이는 성공을 누리는 사람들도 자기모순과 파괴를 겪는다고 생각하면 조금 안심이 됩니다.
자기 자신은 한순간에 바뀔 수 없습니다. 자신은 지난날의 '나'의 축적이기 때문이지요. 다행인 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과거의 '나'는 침식되어 가고, 어느 순간 수용할 수 있는 정도가 된다는 점입니다. 몇몇 과거의 부끄러운 기억들도 지금은 그때 '왜 그랬는지' 이해하게 된 어린 날들이 있습니다. 다소 용기를 가지고 많은 부끄러운 실패를 낳더라도, 미래의 내가 잘 안아줄거라 생각하면 조금 더 과감한 시도도 괜찮지 않겠나는 생각이 듭니다.
닮은 점이 많은 두 작품이지만, 비교해서 보기는 어렵습니다. 처음 글을 기획할 때만 하더라도 두 작품을 조금 더 깊게 연관시키고 싶었죠. 책과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가 다르기도 하고, 무엇보다 어떻게 한 삶에 한 삶을 대입해 비교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두 작품이 비슷하다고 느낀 게 저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두 작품 모두 즐기신 분이 있다면 감상을 남겨주시면 좋겠습니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다음 세대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지만 하루키의 '그어살'도 고야스의 존재로 다음 세대 작가에게 건네는 하루키의 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강한 하루키의 작품이지만 그가 언더그라운드와 1Q84를 거치며 변화한 지점이 돋보이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죽은 고야스를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유령인 고야스를 만나며 그의 삶에 대해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죠. 두 작품 다 하야오와 하루키의 팬이라면 두 창작자의 인생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매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천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