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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라소라빵 May 30. 2024

매드맥스에 담긴 디테일한 사회상들

마초와 페미니즘을 절묘하게 버무린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미리 사족을 덧붙이자면


영화가 킬링타임으로서 제 역할을 다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항상 머릿속에 뭔갈 채우는 건 피곤하니까! 덜어낼 영화도 필요하다.)


그래도 기억에 오래 남는 영화는 결국 되새김질하며 씹고 뜯고 맛볼 재료가 무궁무진한 영화더라. 그리고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오래간만에 영화를 다 본 뒤 카페에서 시끄럽게 목소리를 높여 떠들 만큼 곱씹을 게 많은 영화였다.(지금도 신나게 쓰고 있으니까!)


 싯누런 황야를 질주하는 무법자, 당장 코를 후벼 팔 것만 같은 기름과 화약냄새, 그리고 지루할 틈이 없는 차량 액션. 이 모든 요소를 빼더라도 깊게 파볼 재미가 많은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속 디테일한 설정과 이야기를 두 문명을 중심으로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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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로 돌아간 사회, 다른 지배구조를 지닌 두 문명

매드맥스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장면은 무엇일까? 아마 대부분이 모래먼지를 휘날리며 사막을 질주하는 카체이싱, 화룡점정을 찍는 광적인 폭주족을 꼽지 않을까 싶다. 그 모습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1979년에 개봉한 매드맥스 1편은 수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창작물의 바이블로 자리 잡았다.

좌: 게임 폴아웃 시리즈, 우: 일본 만화 북두의 권


하지만 30년간 칼을 갈아온 감독은 자신을 참고한 작품들보다 더했다. 조지 밀러 감독은 시리즈를 리부트 하며 풍부한 인문학적, 사회학적 상상력을 더해 매드맥스의 세계를 더욱 섬세하게 그려냈다. 그 결과물인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는 서로 상반된 두 문명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데, 하나는 남성 권력자 임모탄 조가 지배하는 시타델, 하나는 모계사회로 구성된 녹색의 땅이다.

남성성, 폭력과 약탈 기계가 돋보이는 황무지의 문명(시타델과 무기농장 가스타운 등)과 여성성과 자연이 돋보이는 녹색의 땅

남성성이 지배하는 시타델

어휴 쇠냄새, 기름냄새... 최고로 좋잖아?

시타델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남성성이 지배하는 사회'다. (여기서 남성성란 생물학적 의미보단 사회학, 혹은 인류학자들이 편의를 위해 임의로 설정한 의미에 가깝다.) 남성성이 여기저기서 울려대는 엔진과 총성처럼 폭주하는 시타델은 매드맥스의 황야처럼 폭력으로 뒤덮인 거친 세계다. 부족한 자원을 두고 공생하기보다 전쟁을 택하며 확장과 권력을 위해 기꺼이 폭력이란 수단을 택한다.

치수로 권력을 잡은 임모탄과 그의 영역 시타델

임모탄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자원 3가지를 다스려 시타델을 통치한다. 바로 물, 기름, 철이다. 이 셋은 매드맥스 세계관에서 상호 보완적인 존재다. 물은 사막화되어 가는 세계에서 식량을 재배하고 식수로 이용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고, 기름은 이 물을 퍼올릴 펌프를 작동하기 위해 필요하며, 철은 기름과 물을 생산하는 요충지를 지키는 무기를 만들기 위해 필요하다. 워보이에겐 임모탄이 절대 권력자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매드맥스의 사회는 실질적으로 이 세 가지 자원을 독점한 각 세력 간 절묘한 균형 덕분에 성립된다. (시타델, 가스타운, 무기 농장이 바로 그 세력이다.)

8 기통 엔진을 상징하는 워보이 특유의 제스처

거친 남자들을 지배하기 위해 필요한 건 자원과 카리스마뿐만이 아니다. 히틀러와 군국주의 시대의 일본이 그랬듯 공격성은 특정한 방향으로만 표출될 수 있게끔 세뇌해야 권력자의 입맛대로 주무를 수 있다. 독일과 일본이 자국민의 불만을 국외로 분출시켰던 것처럼, 시타델은 엔진과 임모탄 조를 숭배하는 광신적인 종교로 워보이를 세뇌하고 있다.

임모탄의 아내들은 남성성이 과잉된 사회에서 여성이 어떻게 취급되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남성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통제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권력이 지속되기 위해선 임모탄이 아내들을 가둔 것처럼 여성을 남성의 지배 아래 두어야만 한다. 공산주의 이론으로 유명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자신의 논문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hums und des Staats)에서 사회구조의 발전을 탐구하며 가부장제, 즉 남성이 왜 사회의 중심이 되었는지에 대해 자기 나름의 가설을 제시했다. 굉장히 러프하게 요약하면 인구가 노동력과 군사력의 핵심인 원시 사회에선 이 인구를 재생산하는 주체인 여성을 권력자가 장악하고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 임모탄이 자원을 독점하고 아내들에게 정조대를 채운 것처럼, 엥겔스를 인용한 2세대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자궁과 경제기반을 독점함으로 남성이 권력을 재생산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여성성으로 대표되는 녹색의 땅
영화에서 묘사된 녹색의 땅.

시타델과 가스타운, 무기농장과는 반대로 푸르름이 가득한 녹색의 땅은 여성성으로 대표되는 문명이다. 여성성은 사회학에서 주로 남성성의 반대인 화합과 조화, 연민으로 정의된다. 그 정의를 대변하듯 녹색의 땅은 비교적 자연의 모습을 온전하고 있으며, 풍력발전과 같은 문명이 남아있는 사회로 그려진다. 영화 속에선 여성 주연들을 조명하기 위해 남성 구성원을 카메라에 크게 잡진 않았지만, 남성도 총기를 들고 있던 걸로 보아 계급이 비교적 평등하게 나눠진 초기 모계사회의 모습을 반영한 걸로 짐작된다.


영화 속 온갖 남성들이 모든 걸 정복하겠다고 서로 싸우며 세상을 피폐하게 만드는 동안에도, 이들은 사막에 씨앗을 심으며 문명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기계팔 의수처럼 남성성을 덧붙인 퓨리오사

퓨리오사는 시타델과 녹생의 땅, 남성성과 여성성이 지배하는 각 문명을 오간 흥미로운 캐릭터다. 그리고 두 문명을 모두 경험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포악한 남성성이 지배하는 시타델에서 살아남기 위해 퓨리오사는 여성성의 상징인 긴 머리를 스스로 잘라낸다. 기름과 모래 속을 뒹굴며 폭력을 행사하는 데도 주저가 없어지며 남성성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한다. 그럼에도 퓨리오사는 고향에서 가져온 씨앗을 이따금 입 안에서 굴려며 그 질감을 느끼고, 자신의 본질이 어디에서 왔는지 되새기는 복잡한 캐릭터다.


야만으로 가득 찬 시타델이지만 남성성에 매몰되지 않은 사람도 있다. 바로 그녀가 작중에서 유일하게 의지한 남성인 잭이다. 잭 역시 폭력을 주저 없이 행사하는 시타델의 인간이지만, 유일하게 퓨리오사에게 여성성의 가치인 연민과 동정을 베푼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퓨리오사는 오직 그에게만 녹색의 땅 얘기를 들려주며 계획을 공유했다.

가솔린으로 동작되는 그녀의 의수는 여성성과 남성성, 두 세계를 한 몸에 지닌 복합적인 모습을 대변한다.

그러나 남성성이 둘러싼 세상에서 여성성을 간직하는 건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다. 그녀가 이곳에 와서 본 거라곤 더 큰 힘으로 힘을 찍어 누르는 방법 밖에 없으니까.


특히 복수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녀는 야만의 연쇄고리 안에 직접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갈 지도(방향을 알려주는 별자리)가 그려진 왼팔조차 자신의 손으로 끊어내고,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다시 한번 삭발하며 폭력이 지배하는 남성성의 세계에 깊숙이 발을 담그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강철과 가솔린으로 동작하는 의수를 얻게 된다. 철과 가솔린은 남성성의 사회를 유지하고 지배하는 폭력 그 자체이다. 그녀는 여성성을 간직한 자신의 팔을 떼어내고, 거기에 남성성을 상징하는 의수를 달면서 더 이상 시타델을 벗어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녀는 복수를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자신을 움직이는 건 분노가 아닌 사람들을 연민하는 마음이라는 걸. 퓨리오사는 복수에서 피어난 과실을 맛보며 다시금 어릴 적의 기억을 되새기고(여성성을 회복하고) 임모탄의 다섯 아내를 탈출시키며 영화는 <매드맥스: 분노의 질주>로 이어진다.


인물과 사회를 다룰 줄 아는 영화

욕설과 피가 낭자한 마초적 영화임에도 뜯어보면 인간과 사회, 장애인과 페미니즘을 다루는 데 굉장히 인텔리 한 영화다. 여성을 트로피로만 다루지 않고, 그렇다고 그 액션이 과장되었다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저 한명의 인간이 살고자 사투한다. 거기에 여성과 남성의 구분은 크게 중요치 않다. 살아남은 놈이 쌘거니까. 팔의 잃은 퓨리오사나 질병에 시달리는 워보이들도  불편해 보이지만 거기엔 어떠한 희화화도 없다. 각자의 희망과 삶을 향해 최선을 다해 투쟁한다. 


감독이 거진 30년 만에 매드맥스를 다시 찍으며 얼마나 칼을 갈았는지는 분노의 도로에서도 느꼈지만, 이렇게 더 뾰족하게 갈고 올지는 몰랐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가 매드맥스가 3편으로 넘어가기 전, 1편에서 부족했던 설정에 살을 덧붙이는 내용임에도 오락 영화로서도, 장르 영화로서도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보통은 너무 많은 걸 설명하고 싶어 영화가 산으로 가는 데 말이다.)



사족1.


같이 영화를 본 사학과 지인은 히스토리맨의 역할에 굉장히 몰입하며 권력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사가의 모습, 감독이 역사를 다루는 시선에서 전율을 느꼈다며 열변을 토해냈다.


항상 낭심 부근에 곰인형을 고 다니는 디멘투스도 굉장히 흥미로운 캐릭터다. 그는 수많은 독재자가 그랬듯 첫눈엔 마치 선의와 대의,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밑천이 드러나면 그의 폭력적이고 유아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그리고 디멘투스란 인물은 역사 속 수많은 정복자들의 패러디이기도 하다. 그가 처음 타고 다니는 전차형 바이크는 알렉산더 대왕, 가스타운을 정복하는 모습은 오디세우스와 트로이의 목마, 큰 트럭으로 산을 가로지르는 모습은 마치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 마지막에 입은 조끼는 나폴레옹을 연상시킨다.

디멘투스의 의상 변천. 역사 속 수많은 정복자들을 오마주한 듯한 인물이다.


그의 이름의 어원은 치매(Dementia)로 해리포터에 나오는 디멘터(Dementor)라는 괴물처럼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살아남느라 희망과 기쁨, 유대를 모두 망각하고 오로지 쾌락만을 추구하는 이름 그대로의 인물이다.




덧붙일 사족 하나 더


난 <분노의 도로>에서 차 앞에 톰 하디를 매달고 달리는 장면이 CG일 줄 알았는데, 영화 비하인드를 뒤져보니 정말 사람을 거기 매달고 찍더라... 카체이싱에 대한 감독의 놀라운 집념이 느껴진다.

감독님 이거 CG로 찍는 거예요?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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