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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누리 Dec 17. 2023

1화 디짐 스카우트

<장기적 우상향 클럽>

  나는 *디짐(D-Gym)에 다닌다. (*디짐은 성수동의 작은 PT샵으로, 관장님 두 분의 이름에 모두 D자가 들어가서 D-Gym으로 지었다고 한다. 디질만큼 운동을 시킨다는 해석은 회원들로부터 만들어졌다.) PT샵은 작은 동네 커뮤니티로, 나처럼 홀로가구의 경우에는 가족이나 친구보다 더 자주 회원들을 마주치게 된다.



성수동 디짐.





  '시바견이네.'

  반려견들과 함께 운동을 하러 오는 회원들이 많은 샵이라, 유산소 스텝퍼를 뛸 때마다 그날의 강아지에게 눈으로 장난을 거는 것은 나의 운동 즐거움 중 하나였다. 강아지의 반응이 있건말건 나는 오만상으로 얼굴을 구겼다가 회원들이 지나가면 모른체 하고 다시 스텝퍼 계기판을 노려본다. 그렇게 오며가며 얼굴을 튼 강아지가 두세마리쯤 되던 날이었는데, 낯선 시바 한마리가 (하체 털린) 나의 시선에 걸렸다.


  "안냥"

  뻑적지근한 하체털림을 외면하고자 시바의 어깨죽지를 쓰다듬었다. 손바닥에 한웅큼 황금노랑털이 꽂힌다. 이관장님의 예의주시에 걸리겠구나 이녀석. 이관장님은 디짐의 청결대장인데, 나는 늘 속으로 저분은 분명히 볼드체-J일 것이다 라는 편협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시나. 나중에 시바가 가고 난 자리를 이관장은 곧바로 쓸고닦았더랬다. 그는 말은 않았지만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시바의 황금노랑털.)


  "횐님, 데드 1세트 남았어요."

  3대 250의 꿈을 안고 PT샵에 등록했지만, 3대 150마저 내겐 큰 산. 웨이트를 시작하며 냉큼 구입했던 WSF스트랩을 다시 양 손에 아로낀다.


  "스트랩 차는건 상위 1% 인정이요."

  얄미운 PT선생님의 말을 귓등으로 튕겨내고 욕심내어 원판 한장 더 얹은 바벨을 간격에 맞추어 잡아쥔다. 일전에 친구가 그랬다. PT샵에서 멋있어 보이는 방법은 선생님의 카운트에서 말없이 다섯번을 더 무게치는 것이라고. 가끔 내 가오가 좀 죽었다 싶은 날에는 그 말을 떠올리며 약속한 횟수보다 다섯번을 더 무게를 든다. 다만 나는 생색내기 없이 못사는 인간이라, '말없이'의 실천이 작동하질 않고 이거봐요저다섯번이나더했음요하하하열라멋진듯 이런 소리를 하고야 만다.


  선생님과 복근운동 할까말까 실랑이를 하던 중, 거울 너머로 운동으로 양 볼이 붉게 물든 귀여운 여자가 의자에 묶여있던 시바견의 리드줄을 허리춤으로 옮긴다. 나의 시선도 그녀를 좇는다. 기어코 선생님 잠시만요 하고 여자에게 다가간다.


  "너무 귀여워요."

  "아, 친구 강아지에요. 후쿠오카에서 와서 후쿠에요 이름이."

  "헉. 그마저 귀엽네요."

  처음 본 여자와 강아지를 배웅하고 마지막의_진짜_마지막으로 선생님과 약속한 복근 3세트에 돌입했다.


  인스타그램으로 그녀를 찾았다. 디짐 계정의 스토리에 자주 태그가 되는 여자였다. 허리춤에 시바의 리드줄을 묶은 모습을 대번에 알아채고 팔로우를 눌렀다. 동족의 냄새는 기가 막히게 알아보는 나이니까. 그녀는 문구브랜드를 운영하는 그림작가였다. 스티커나 엽서, 떡메모지 같은 것들이 계정에 잔뜩 포스팅되어 있었고. 나와 또 다른 공통점. 달리기를 하는구나. (아 물론, 간헐적으로. 후에 알게 되었지만 우리는 둘 다 '달리기 지망생'에 가까웠다. 사실 그렇다.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이들은 사실 그것을 갖지 못한 상태라는 반증이어라.)


  당시 나는 '월간 운동 계획'과 '긍정카드 필사'에 꽂혀있었는데, (앞서 말했지만,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이는 사실을 그걸 갖지못한. 내겐 심적/신체적 동력이 필요했다.) 월간 운동 계획은 웨이트/등산/러닝/요가를 한 달의 화이트보드형 달력에 잘 분배하고 실행 후 체크하는 작업이었다. 또, 긍정카드는 '밑미'라는 리추얼 플랫폼에서 나온 긍정적인 마음들 40여가지가 적혀있는 카드로 나는 아침마다 출근 전에 그날 마음에 차는 카드를 고르고 따라 쓰고 스토리에 인증하는 것이 하루의 즐거움이었다. (그 중 가장 좋아하는 카드는 '재치'와 '분별력'. 여전히 때때로 카드덱을 넘기며 읽거나, 따라 쓰는 일을 좋아한다.)


  당시, 긍정카드처럼, 운동이나 식단도 어느정도 정해진 카드로 된 선택지가 있어서 매일매일 운동과 식단을 골라서 기록하고 인증도하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매일 상하체 루틴과 단백질을 고민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월간 운동 계획. 그리고 단백질 단백질 단백질.




  '헉. 작가님께 같이 하자고 해볼까.'

  내가 기획을 하고 그녀가 그림을 그리면 어떨까. 겨우 시바견 이야기 한번 튼 사이였지만, N력이 90쯤 되는 내 머릿속에는 우린 이미 도원결의 협의체가 되어있었다. 되든안되든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A4 2장짜리 '운동카드 식단카드 제작 기획서'를 만들었다.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나의 전문 분야이니까. 손에 잡히지 않는 소프트웨어에 갑갑증이 난 상태였기에, 실물이 잡히는 '카드'라는 물건은 내게 몹시 매력적인 소재였다. 기획서가 대강 갈무리 되어 .pdf 내보내기를 하던 시점에 나는 핸드폰을 열어서 그녀에게 DM을 보냈다. (내게 이런 용기가 있는 줄은 나도 몰랐다.)


  "안녕하세요. 회원님, 내일 디짐 계획 있으신가요?

저 하나 상의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렇게 그녀와 나의 첫 공식 일정이 잡혔다. 어느 구월 수요일 저녁, 디짐 상담데스크에서 정수물을 끼고 대화.


  그녀는 예상보다 훨씬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림작가 이전에는, 러시아어 통번역가 일을 하였고 이따금씩 주변에 손글씨 써주는 일을 하다가 작은 두들을 그리며 문구브랜드를 시작했더랬다. 문구브랜드가 생각보다 반응이 생기자 고민의 시간을 지나 지금의 선택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어떤 포털사에 다니는 마음속 파랑새 품은 직원쯤으로 본인을 소개했다. 그리고 본론을 꺼냈다.


  ".pdf 파일을 하나 전송할게요."

  나는 그제 고심해서 만든 기획서 파일을 보내고 운동카드와 식단카드에 대한 이야기를 청산유수로 내뱉었다. (사실 청산유수는 아니고 말을 수시로 절었는데 지금 좀 미화하고 싶어서 그렇게 표현했다.) 정말 출시까지 하고싶다는 의지를 보이면서, 그런데 자본은 별로 없어서 고민이라는 솔직한(a.k.a.대책없는) 이야기도 했다. 상담데스크에서 말없이 나의 말을 흡수하던 그녀가 입을 뗐다.


  "재밌어보여요. 그런데 제가 요즘 작업이나 이런게 좀 아직 복잡한 상태고 그래서.. 생각을 좀 해볼게요."


  "아, 바로 답해주시진 않아도 되어요 물론. 다음달에 이야기 주셔도 되고. 음 그래도 일정이 없으면 좀 그러니까 아무튼 그럼 추석 지나고 또 이야기해요."




.pdf를 전송했다. 첫번째 카톡.




  인생이 *백로그(*backlog;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에서 많이 사용되는 용어로, 완료되지 않은 작업 항목들의 리스트나 목록을 뜻한다.)인 나이다. 그러니까 '할 수도 있잖아?'라는 기회와 가능성들을 먹고 사는 사람. 어쨌든 1보 전진했다는 생각으로. 느슨하고 꾸준하게 나아간다. 낯선 이들 앞에서는 대부분의 말을 삼키는 본인이다. 내가 시바견을 산책시키는 모르는 그림작가와 말을 트고 작업을 제안하고 그런 것을 할 줄 알았냐고. 그것만으로 대견해 나자신. 나는 그 구월을 '디짐 스카우트'로 기록했다.













디짐에서의 만남은 어떤 사건을 만들어낼까요?

현재진행중인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

아차차. 추워요.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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