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월-금계 코스
지리산은 막 그렇다. 엄청 높지 않아도, 엄청 빼어나지 않아도 그 안으로 들어가면 포근하게 나를 안아주고, 별거 없는 사람이라도 따스하게 위로해주는 느낌이 있다. 몇 번이나 지리산을 갔지만 항상 그런 느낌이 들었다.
작년 가을 어느 목요일, 우연히 지리산 둘레길에 대한 어느 블로그 글을 보고, 문득 내일은 지리산에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금요일 퇴근하자마자 남부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인월로 향했다. 밤늦게 도착해서 연탄불고기를 반주없이 먹고 여관에서 하룻밤을 잔 뒤, 새벽 일찍 길을 나섰다.
아침으로 북어국을 사먹고 나오자 날이 밝아져 있었다. 10도 내외의 다소 쌀쌀한 가을 날씨. 뭐가 그리 좋은 지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무도 없는 인월 시내를 가로질렀다.
인월에서 금계로 가는 지리산 둘레길 코스는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길이다. 빨리 서두르면 종착지인 금계에서 함양으로 간 다음, 거기서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트래킹할 때 걷는 속도는 대략 5.3km/h 정도 된다. 아무 생각없이 걸으면 이 정도이고, 느리게 걸어야겠다, 서둘러야겠다 생각하면 달라진다.
3코스 초입은 강을 따라 난 오솔길 코스이다. 아침 새소리를 들으며 상쾌한 공기(공기도 맛이 있다)를 마시며 걷는 길은 남아 있던 졸음과 걱정까지 싹 달아나게 했다.
오솔길이 끝나고 오르막이 시작되는 지점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 부지런한 아낙들과 성실한 농부들도 토요일에는 늦잠을 자는 듯. 아침 6시의 이 조그만 마을은 아직 인기척 하나 나지 않았고 불때는 연기 하나 맡아지지 않았다.
길을 가면 갈수록 세속에서 멀어지고, 길이 끝나고 숲이 사작되어 다시 지리산 능선으로 이어지면 온통 나무들의 세계가 나타난다. 나무들에 둘러쌓여 계속 걷다보면 그대로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무 일찍 서둘러 나왔는 지, 그래도 주말인데..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이 길은 지리산 둘레길, 지리산을 올라갈 때와는 맛이 확실히 다르다. 등산과 트래킹은 엄연히 차이가 있지만, 지리산 둘레길은 오르내리막이 계속 이어져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나를 찍어줄 사람은 오직 나일 뿐. 오늘도 도로 반사경이 나타날 때마다 약속이라도 한듯이 스스로를 찍는다.
한 10여km를 왔나. 조금씩 힘이 들기 시작한다. 오면서 계속 에너지바, 바나나, 두유 등을 먹으면서 왔는데 허기가 진다. 잠깐 어디 앉았다 가려고 했는데 땅바닥에 주저 앉지 않는 한 앉을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길 가에 적당한 바위나 경게석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계속 이어지는 오르 내리막길, 10시쯤 되자 반대편에서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나와는 반대로, 금게에서 인월로 넘어가는 분들이었다. 아주머니 서너명이 뭐가 그렇게 재밌는 지 깔깔 웃으며 지나가는데, 오늘 일어나서 지금까지 한 말이라곤 '식사되죠? 얼마에요? 감사합니다' 세 마디 뿐이었던 나는 어쩐지 그녀들이 부러웠다.
길을 계속 가다가 금계까지 2~3km 남겨둔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다리가 아파왔다. 제주도 올레길도 한 바퀴 돈 나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리해서 좋을 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 사실 능선 하나만 넘으면 금계이지만, 그 '능선 하나'에 무리를 가할 필요는 없겠지.. 나이 드니까 포기도 쉽게 한다. 하나도 안부끄럽다.
포기하는 기념으로 셀카도 찍고, 네이버 지도에서 근처 버스 정류장을 찾았는데.. 운 좋게도 하루 5번 다니는 이 두메산골 마을에 마침 버스가 곧 온단다. 버스 타고 인월로 다시 돌아와서 시외버스정류장 앞 어느 식당에서 6천원짜리 부대찌게를 한그릇 사먹고 함양을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 7시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아침에 새벽같이 일어나 오후 2~3시까지 지리산 둘레길을 걸었다는 게 꿈만 같았다.
가져는 갔으나 정작 찍은 사진은 별로 없었던 '올림푸스 PEN EP7 + 삼양 12mm F2 단렌즈', 두바이에서는 아주 잘 가지고 놀았다. 무겁고 비싼 카메라보다 적당한 성능의 요런 컴팩트한 게 요즘은 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