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는 삶의 고통에 대하여 하소연하라고 말했다. 세부적으로는 '고통을 인생의 시련이자 가르침이라 말하지 말라! 고통은 고통일 뿐이다. 인생에 고통이 찾아왔다면 하소연하라. 그것이 건강하다' 라는 말을 했는데 참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흔히 노력은 왜 고통스러워야 하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야만 좋은 것을 쟁취할 수 있는지 항상 의문이었다. 그리고 이 말을 듣고 다들 똑같이 생각하는구나 싶었다. 아파야 청춘이고 젊을땐 사서 고생, 그게 다 경험이라는 어이없는 말. 경험이고 자시고 그런 고통은 본인이나 겪었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의 불만족, 불평등의 원인은 능력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학력이나 학벌보다 능력을 우선시해서 대우를 해주는 게 더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학력도 학벌도 능력으로 치부해버리는 사회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계급사회가 된 것이다.
사람들이 일을 하는 이유는 '뭔가 이루기 위해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으로 생각한다는 응답이 제법 있다는 조사 결과를 봤다. 사회초년생 때는 내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일에 매진했다면, 사회 경력 3-4년차가 넘어서면 이제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돈은 벌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바뀐다. 확실히 맞는 말인게 나 역시 일을 하는 이유는 돈이라고 최근까지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히 따져보면 내가 원하는 직업을 가졌을 때는 돈보다 내 커리어와 재미가 우선이었다. 돈을 벌지 못했기 때문에 그만 둔 경우로, 아마 돈까지 따라왔으면 제법 오래 일을 했었을거다.
이 세 가지 내용을 돌이켜봤을 때 결국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집게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게 돈이 있어야 한다. 정신적 만족을 얻으면 되는게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다만.. 굶어 죽으면 무슨 소용이겠냐 싶다. 나는 첫 직업을 가지고 나서 천만원을 모아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그리고 6년 동안 정신적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제 2의 인생을 살았다. 6년이 지난 나는 최저 시급도 받지 못하는 월 160따리 인생을 살고 있었고, 영양실조와 들고 올라온 돈의 일부인 600만원만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돈은 월세 보증금으로 들어갔으니,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한달에 160만원. 타향살이를 하는 내가 버티기엔 돈이 부족했다. 이미 고정금이 달에 80 이상 들어가는 상황이었고, 야근을 밥먹듯 했으니 택시비와 식비로 남은 돈을 다 썼다. 결국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뿐만 아니라 마이너스였다.
돌이켜보면 6년이란 시간은 내게 삶의 즐거움을 알려주기도 했지만 꽤나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주변에 이야기 해도 '야, 나도 힘들어'라는 말만 들었다. 다 그렇게 사니, 괜한 말은 하지 마라는 말이었겠지만 힘듦을 사회구조적 문제가 아닌 자신의 문제로 치부해버리는 것에 염증을 느꼈다. 결국 내가 더 많은, 좋은 커리어를 쌓지 못했고, 올라가지 못해서 적은 돈을 받으며 일을 한 것 뿐이라는 것이다. 이게 바로 젊을 때 고생은 사서 고생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했던 상황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모든 것이 나의 문제인 이 사회에서는 살아갈 수 없겠다. 그렇다면 내가 떠나야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지내고 싶다. 모든 구조적 현상이 사회적 문제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만 당할 수 없지 혹은 어차피 변하지 않을 거니까라는 마음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인색하고, 자신에게 인색하다. 이해하고 배려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의 상황을 말할 수 있는, 말해도 약점이 아닌 세상에서 그저 그렇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