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나와 평범한 나 사이에서
퇴근길 전화 한 통
퇴근길 전화 한 통이 왔다. 발신자를 보니, 교사를 대상으로 원격 연수를 만드는 A 회사의 담당자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원격 연수 있잖아요.”
담당자가 머뭇거리다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네. 선생님 한 분과 같이 제작하기로 했던 원격 연수요? 혹시 무슨 문제가 생겼나요?”
한참 뜸을 들이던 담당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함께 연수 진행을 맡기로 하셨던 선생님께서 사정이 생기셔서, 연수 제작이 어렵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가요? 아쉽지만 할 수 없죠.”
담당자가 의기소침한 내 목소리를 뒤로하고, 계속 말했다.
“아쉽지만, 일정이 좀 많이 밀릴 것 같아요. 또 섭외되는 선생님에 따라서 촬영 콘셉트도 달라질 수 있고요. 함께 할 수 있는 다른 분을 적극적으로 섭외하고 있어요. 촬영도 꼭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네.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너무 염려하지 마시고요. 또 연락드릴게요.”
원격 연수 제작 제의를 받다
몇 달 전, 교사들의 고민 상담을 콘셉트로 원격 연수를 제작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나를 포함해서 두 명의 교사가, 다른 교사의 고민에 관해 조언해 주는 방식이라고 했다. 난생처음 찍는 원격 연수라 두렵기도 했지만, 날아갈 듯 기뻤다. 다른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꿈을, 미약하게나마 이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심 이번 기회로 인지도도 높이고, 나름대로 교사들 사이에서 유명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도 되었다.
아직 촬영은 시작도 안 했고, 주변 사람 누구도 나를 알아봐 주지 않았다. 하지만 벌써 무언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런 기분 낯설지가 않다. 1년 전, 첫 책 출간을 앞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내 책이 나오기만 하면 특별한 사람이 되겠지. 출간 이후엔 누구를 만나든 오랫동안 내 책 얘기를 할 거야. 대단하다는 반응은 너무 많이 들어서 싫증이 날 테고. 그렇게 한동안 혼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하늘을 붕붕 날아다녔다. 그런데 그런 감정에서 돌아오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쓴 책이 세상에 나왔지만, 나의 삶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초반에 지인들이 내 책에 보였던 관심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나는 항상 출간 당시의 들뜬 감정에 머물러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내가 출간했던 사실조차 금세 잊어버렸다. 내가 책을 출간하며 수고한 사실을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것 같아서, 속이 쓰렸다. 그렇게 일상으로, 또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나로 돌아왔다.
원격 연수 제작이 무기한 연기되다
원격 연수 제작이 무기한 연기되던 날, 머릿속이 멍했다. 그간 상상 속에선 벌써 몇 편이나 원격 연수를 찍었는데, 정작 시작도 못 해보고 이렇게 끝나버리다니. 참 서글펐다. 연수 제의를 받은 이후로, 그날을 기대하며 살았다. 머릿속에 온통 남다른 나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비범한 날을 꿈꾸다 보니, 평범한 일상생활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에서 아이가 해맑게 뛰어노는 모습도, 학교에서 아이들과 평범하게 수업을 하는 모습도 도무지 눈에 띄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아이가 잠도 자지 않고, 새벽까지 울었다. 손을 가져다 대니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한걸음에 대학 병원 응급실에 가서, 해열제 처방을 받았다. 해열제를 먹여봐도 열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원인불명의 열이 지속하여 결국 아이가 병원에 입원했다. 아이를 돌보며 아내가 병실에 상주하였고, 나는 아내와 아이와 떨어진 채 홀로 집에 남았다. 밥을 먹어도 재밌는 영상을 봐도 즐겁지 않았다. 한편 아이는 아무리 약을 써도 열이 잡히지 않았다. 열이 난 후 6일째 되던 날, 항생제를 쓰고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고서야 열이 떨어졌다. 그렇게 거의 일주일 만에 아이와 아내가 집에 돌아왔다.
아이가 아프기 전에는 연수 생각만 가득했는데, 아이가 아프고 난 후에는 연수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일상이 그저 감사하기만 했다. 그동안 평범한 일상 속 기쁨을 잊고 살았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아이가 활짝 웃는 모습이, 세 식구가 함께 식사하는 일상이 행복하단 걸 깨닫게 된 것이다. 또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서 의미가 덜해 보였던 평범한 교실 속 수업 장면도 눈에 들어왔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내게 무심코 건네는 말이, 수업 시간에 진지한 눈빛으로 내게 집중하는 모습이 보였다.
평범한 날의 의미를 돌아보다
물론 특별한 날을 꿈꾸고, 남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은 건 아니다. 다만 그날만 바라보다가, 평범한 날을 흘려보내는 건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이한 순간은 잠시뿐이고, 범상한 날은 오랜 시간 지속하기 때문이다. 각별한 순간을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부분 시간을 차지하는 무난한 하루를 어떻게 충실하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게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또한, 일상에서 의미를 찾고,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면 새로운 기회도 자연스럽게 찾아올 것이다. 하루하루 꾸준히 쓰던 글이 오랜 시간 모여서 책이 되었고, 그 책을 읽은 누군가가 연수 제작도 제안했던 것처럼 말이다. 설사 그런 기회가 찾아오지 않으면 또 어떤가. 하루하루 알차게 지내면 스스로가 단단해질 테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