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같이 보드게임 해요
“선생님, 오늘 방과 후에 동 학년 선생님들과 함께 카페 가려고요. 선생님도 시간 괜찮으시죠?”
“네. 그럼요 저도 좋아요.”
“카페에서 보드게임도 같이 하기로 했어요. 선생님도 보드게임 좋아하시죠?”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들과 같이 카페 가는 건 좋은데요. 보드게임은 안 하고, 구경만 할게요.”
옆 반 선생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연히 그럴 만했다. 지난 학교에서는 보드게임 교사 동아리도 새로 만들고, 자칭 타칭 보드게임 전도사가 아니었던가. 그런 내가 보드게임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니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보드게임에 몰입하다
나는 한 가지에 몰두하면, 끝장을 볼 정도로 몰입한다. 몇 년 전, 내가 몰두한 일은 보드게임이었다. 어느 교실을 가든 카드를 내고 과일 개수에 맞추어 종을 치는 가벼운 보드게임이 한두 개씩은 있었다. 그런 가벼운 보드게임만 접하다가, 우연히 한 게임에 한두 시간은 필요한 전략 보드게임을 알게 되었다. 두뇌 회전을 활발하게 하며 답을 찾아가는 보드게임을 하면서, 깊은 희열을 느꼈다. 함께 삼삼오오 어울려서 화기애애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보드게임은 자연스럽게 가장 소중한 취미 활동이 되었다.
초등 교사의 좋은 점은, 얼마든지 취미를 교육과 연관 지을 수 있다는 점이다. 수학 시간에는 숫자 세기와 관련된 보드게임을 접목할 수 있었고, 사회 시간에는 여러 나라의 국가와 특징을 알려주는 보드게임을 적용하며 수업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보드게임으로 수업까지 할 수 있으니 행복했다. 아이들은 보드게임을 활용한 수업을 즐거워했고, 주변 동료들도 지지하며 응원해 주었다. 더불어 교내에 보드게임 교사 동아리까지 만들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동료들에게 새로운 게임을 소개하며 보드게임을 함께 즐겼다.
보드게임이 일이 되다
보드게임을 즐기기만 하다가, 제대로 전문성을 갖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과 비용을 지급하며 보드게임 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보드게임 지도사를 준비하면서 다양한 보드게임까지 알게 되니, 학교에서 더 깊이 적용하고 싶어졌다. 마침 교내 방과 후 교육 복지 프로그램의 한 꼭지로 보드게임 강좌가 생겼고, 내가 그 강좌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로 방과 후에 매주 2시간씩 교육 복지 대상 아이들에게 보드게임을 소개하는 일을 했다. 새로운 게임이 나오면 누구보다 먼저 게임 방법을 익혀서 아이들에게 소개하였다. 취미로 시작했던 보드게임이 어느 순간부터, 본격적인 일이 되었다.
편안한 시간에 주변 좋은 사람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원하는 보드게임을 즐길 때는 참 즐거웠다. 그러나 매주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아이들 수준에 맞는 보드게임 활용법을 가르치는 일은, 별로 즐겁지 않았다. 보드게임을 매개로 한다는 것은 같았지만, 내가 게임을 직접 하는 것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일은 천차만별이었다. 아이들은 게임을 하다가 종종 싸웠고, 싸움을 중재하다 보면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가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난이도의 게임은 아이들이 어려워했기 때문에, 쉽고 간단한 게임만 소개하였다. 아이들에게 적합한 게임은 지나치게 쉽고 교육적이어서, 소개하는 처지에서도 전혀 흥이 나지 않았다.
보드게임을 쳐다보기도 싫어서
한편 보드게임에 흠뻑 빠져있을 때, 집 방 한 칸을 모두 비우고 작은 보드게임 방으로 만들었다. 방 중앙에 커다란 사각 테이블을 두었고, 커다란 선반을 두 개나 사서 보드게임으로 하나둘 채워 넣었다. 사비로 틈날 때마다 사 모으다 보니, 선반이 100여 개의 보드게임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100여 개의 보드게임을 가만히 바라만 봐도 흐뭇했다. 보드게임이 본격적으로 일이 된 후로는, 보드게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되었다. 그 순간부터 100여 개의 보드게임을 하나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지인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었고, 값어치가 있는 것들은 중고로 판매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방과 후 프로그램도 맡지 않게 되었고, 학급에서도 보드게임 활용법을 가르치는 시간도 줄여나갔다.
보드게임, 취미를 잃어버렸다
그렇게 소중한 취미를 잃어버렸다. 틈날 때마다 보드게임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새로운 게임을 찾아보고 익히던 내가, 보드게임을 생각만 해도 진저리 쳤다. 마음속 한 편에 보드게임이 머물던 자리에, 현재는 글쓰기가 대신하고 있다. 여유 있는 시간에 혼자 생각을 정리하며 글을 쓰고, 사람들과 그 글을 나누는 일이 취미가 된 것이다. 과거에는 취미를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이 참 부러웠다.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 취미는 취미로 남았을 때 더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미가 일이 되었을 때 왜 힘들었던 걸까?
취미에서 중요한 요소는 자율성이다. 내가 원할 때, 원하는 장소에서 즐길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취미가 일이 되면, 자율성이 사라져 버린다. 시간도 장소도 행동도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정해진다. 어떤 일이라도 억지로 하게 되면 흥미가 반감되지 않을까.
또한 취미와 달리 일은 책임을 수반한다. 취미 활동은, 사정이 생기면 한 번쯤 쉬거나 거를 수 있다. 하지만 일로 하게 되면 내 맘대로 건너뛸 수가 없다. 취미는 활동하다가 재미가 없으면 언제든지 중단하면 되지만, 일은 맡은 순간까지 끝까지 수행해야 한다. 이렇듯 책임이 느껴지는 일은, 즐기기가 어렵다.
마지막으로 일의 대가로 보수까지 받기 시작한다면 그 즐거움은 더욱 희석된다. 예전에는 즐거움 추구가 보드게임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돈이 목적이 되면, 즐거움이 부차적인 목적이 되어 버린다.
글쓰기가 취미로 남을 수 있기를
최근 위기감을 느낀다. 가볍고 즐겁게 시작한 글쓰기가, 어느 순간부터 일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혼자만 글을 쓰고 간직하는 게 아까워서, 블로그와 브런치에 글을 게시했다. 월간지와 신문사 교단 일기에 정기적으로 연재도 하고, 책으로까지 출간하게 되었다. 물론 월간지나 신문에 글을 게시하면 더 많은 독자 앞에 글을 내보일 수 있어서 행복하다. 다만 정해진 시간, 짜인 틀에 내 글을 맞춰가야 하는 것은 크고 작은 압박으로 작용한다.
글쓰기라는 의미 있고 재밌는 취미 활동을 오래도록 이어 나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처럼 일을 많이 늘려나가지 않을 작정이다. 부담감이 즐거움을 막지 않도록 말이다. 또한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자유롭게 글을 한 편 두 편 써놓고 모아놓을 생각이다. 요청이 왔을 때 전에 써 놓았던 글을 추려서 보내는 일은 부담 없지만, 마감 날짜에 쫓기며 쓸 내용도 없는데 글을 짜내야 하는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기 때문이다. 글쓰기, 취미와 일 사이에서 묘한 줄타기를 잘 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