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그날
10년 전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무렵 특별한 이유도 없이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임용 3차 시험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좀처럼 힘이 나지 않으니, 온종일 방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험 준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몸살이 났나?’
링거 한 번 맞으면 불끈 힘이 날 것만 같았다. 홀로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링거를 놔주지는 않고 갑자기 뚱딴지같은 말을 했다.
“얼굴이 심각하게 노랗네요. 혈액 검사 한 번 받아봤으면 좋겠어요.”
뜬금없이 혈액 검사
임용 최종 관문인 3차 시험을 앞두고 있던 터라 몸도 마음도 여유가 없었지만, 군말 없이 혈액 검사를 받았다. 잠자코 혈액 검사를 받으면 곧 링거도 놔줄 것이고, 몸도 회복될 것이다. 잠시 후, 검사 결과가 나왔다. 의사 선생님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백혈구 수치가 매우 높네요. 소견서를 써드릴 테니 3차 병원으로 바로 가보세요.”
웬만한 병은 2차 병원인 이곳에서도 치료가 될 텐데, 불안하고 몹시 당황스러웠다. 평소 같으면 돈이 아까워서 대중교통을 이용했겠지만,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택시를 타고 가까운 대학 병원으로 향했다.
커다란 문제
인근 대학 병원 응급실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응급실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는데, 괜히 불안했다. 나에게 정말 큰 문제가 생긴 걸까. 1주일밖에 남지 않은 임용 시험을 잘 마무리해야 하는데…. 한참 후, 간호사를 대동하고 찾아온 의사가 나를 무균실로 옮겼다. 무균실이라니, 큰 문제가 생겼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보호자 분은 어디 계세요?”
“네. 저 혼자 왔어요.”
“빨리 보호자 분께 연락을 드렸으면 좋겠어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혈액 검사 결과를 보면 혈액 쪽에 큰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골수 검사를 해봐야 명확히 판정을 할 수 있지만, 백혈구 수치가 워낙 좋지 않아서 백혈병일 가능성이 커요. 우리 병원에서도 백혈병을 최선으로 치료를 할 수 있지만, 만약 더 큰 병원에 가고 싶으시면 지금 옮기셔도 좋아요. 나중에 전원 하시면, 환자분께서 더 힘드실 테니까요.”
쏟아진 눈물
백혈병이라니…. 응급실 젊은 의사의 담담한 이야기를 듣는데,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드라마 같은 곳에서 보면 중병에 걸리면, 소리도 지르고 울며불며 의사에게 매달리던데 정작 나의 반응은 담담할 뿐이었다. 다만 걱정되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내 상황을 부모님께 어떻게 알려야 할까 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1주일여 남은 초등 임용 3차 시험을 포기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고민 끝에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엄마. 나 지금 대학 병원에 왔는데. 보호자가 와야 한 대. 빨리 와줘. 나, 백혈병이래….”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가 울면 엄마가 걱정할 것 같아서, 연신 눈물을 닦았다.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마음이 시리다. 날벼락같은 내 연락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오시던 어머니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기나긴 치료와 요양
응급실을 나와서 백혈병 치료로 유명한 유명 대학 병원으로 전원을 했다. 골수 검사를 받고 최종적으로 급성 골수성 백혈병 판정을 받았다. 그 후로 약 1년간 병원과 집을 오가며 기나긴 사투를 벌였다. 1년간 병원 생활을 마친 후에는 집에서 1년 동안 요양을 하며, 몸을 만들었다. 백혈병 판정을 받은 후, 그저 하루하루 살았다. 1년 후, 10년 후를 꿈꾸지 않고, 하루 분량의 삶만 온전히 살아냈다. 오늘이 주어졌음에 감사하고, 또 다음 날이 있음에 감사할 뿐이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을 때, 그동안 내가 누려왔던 평범했던 하루가, 절대로 평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 날 항암 치료를 마치고 오솔길을 산책했다. 노을이 지는 저녁에, 길이 참 예뻤다. 아무도 없는 그 길 위에서, 갑자기 달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미친 사람처럼 아무 생각 없이 혼자서 한참을 달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살아있음에, 또 이렇게 성한 몸으로 달리기를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다시 일상으로
중병을 치료하는 과정도 큰일이었지만, 몸을 추스른 후에 다시 이전과 같은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 게 더 큰 일이었다.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혹시 병이 재발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최대한 초연하려고 노력했다. 하루하루를 살아냈던 것처럼, 이제는 1년 단위로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5년 후, 10년 후 미래를 생각하는 건 사치일 뿐이었다. 그저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내며, 생존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삶만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연차가 쌓이면서 건강에 대한 염려도 줄었다. 교사 생활에도 조금씩 여유가 생겼다. 내가 좀 살만해지니까, 이제는 주변 동료들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어려움을 겪는 저 경력 교사들이 보였다. 그 무렵 언론매체를 통해서 교직의 스트레스 속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는 교사 소식이 종종 들려왔다. 그럴 때마다 발령을 받고 의지할 곳 없이, 혼자 끙끙대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학교 내외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나는 육체적으로 질병을 얻었고, 그들은 마음의 병을 얻게 된 것이 아닐까.
저 경력 교사를 위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료 교사, 특히 후배 교사들에게 어떤 말이라도 전하고 싶었다. 이런 생각이 가득해졌을 때, 내가 속한 교사 단체에서 새롭게 시작한 저 경력 교사 지원 행사가 눈에 들어왔다. 큰 고민 없이 프로그램에 멘토 교사로 참여했다. 호기롭게 행사에 참여한 것은 좋았는데, 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만 있을 뿐 내 속에 명확한 메시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마음도 중요하지만, 명확하게 전달할 메시지도 필요했다. 그래서 틈날 때마다, 내 생각을 정리해서 적어나갔다. 블로그에, 브런치에, 그리고 월간지에 내 생각을 글로 남겼다. 하나씩 흩어져있던 글이 모였고, 1년 전에 책으로 출간까지 했다.
후배 교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 이제는 출간도 했으니, 다양한 연수를 통해 그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출간만 하면 인근 학교나 교육지원청 등 여기저기서 나를 강사로 찾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내 생각과는 다르게 어디에서도 날 찾지 않았다. 아무도 날 찾지 않는데 나 혼자 찾아가서 후배 교사들을 위로하고, 또 내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저 묵묵하게 글쓰기를 이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뜬금없는 연락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사설 원격 연수원에서 연락이 왔다. 원격 연수를 제작하고 싶다는 제의였다. 연수를 통해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뛸 듯이 기뻤다.
바로 제작될 거라고 예상했던 연수가, 연수원의 사정으로 제작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처음에는 연수를 바로 찍지 못해서 아쉬웠고, 또 프로젝트가 무산될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오히려 계획이 연기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아직 준비가 덜 되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연차가 쌓이고 글을 쓰고 출간까지 하면서, 스스로가 아주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해도 괜찮은 교사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새로운 학교에 오면서 그런 내 생각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동안 내가 단단해진 것이 아니라, 이전 학교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 보니 몸도 마음도 편해졌던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학교를 옮겨서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들 속에 머무르게 되니 신규교사 시절처럼 또 어리바리해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연수를 개설하여, 당당한 척 동료 교사들에게 메시지를 전했다면 스스로 참 민망했을 것 같다.
지금은 새로운 학교에서 시간을 조금 더 보낸 후라, 몸과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연기되었던 원격 연수 촬영 계획이 다시 구체화되었다.
세상 밖으로
물론 아직도 교사로 또 강사로 부족함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첫술에 배부를 수도 없을 것임을 잘 안다. 연수를 촬영하고 집에 돌아와서, 괜히 쓸데없이 일을 벌였다고 연신 이불 킥을 날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결과를 얻더라도, 결과보다는 과정 자체에 주목하려고 한다.
10년 전 병원에서 혼자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던 내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어서 참 감사하다. 내 몸을 챙기기도 힘들었는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정말 좋다. 10년 전에 교실 속에서 홀로 고민하며 전전긍긍하던 나에게, 또 비슷한 후배 교사에게 힘을 내라고 한마디를 전할 수 있어서 감격스럽다.
사실 카메라 앞에서 잔뜩 긴장한 채 버벅댈까 봐 두렵다. 그래도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묵묵하게 새로운 길을 가보려고 한다. 그런 미약한 내 모습을 보면서, 저 경력 교사가 동질감을 느끼고 위로를 받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5년 후, 10년 후에는 더욱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서, 삶과 글을 통해서 지속해서 후배 교사에게 위로를 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제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원격 연수 제작을 준비하며, 원고도 미리미리 쓰고 몸과 마음도 잘 추슬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