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치스럽게 죽고 싶다. 죽음 앞에서 갖은 사치를 다 누리면 좋겠다. 죽기 전에 내 온 피붙이 다 붙들고 ‘이제 나는 어쩌냐’, ‘이제 너는 어쩌냐’ 목놓아 울고 싶다. 미운 놈 찾아가서 남은 미움 다 끌어 모아 세게 한 방 날려주고 싶다. 미안한 사람이 있다면 용서를 빌면 좋겠다. 그렇게 남은 미련이라고는 없이 떠나고 싶다. 집안은 깨끗하게 청소해두고 싶다. 남들에게 보이기 싫은 것이 있다면 미리 다 치워두고 싶다. 소중히 간직해온 물건들은 잘 정리해 주변에 선물도 하고 싶다. 마지막에는 가장 좋아하는 옷을 입고 있으면 좋겠다. 작은집 할머니처럼 햇살이 부서지는 정오 무렵에 좋아하는 우리 남편 위해 맛있는 한끼 식사를 차려놓고, 피곤한 눈을 잠시 붙이듯 그렇게 소파에 기대어 스르르 잠자듯 세상을 떠나면 좋겠다. 그렇게 미련 없이 욕심껏 최고로 아름답게 죽는다면 좋겠다. 이르던 늦던 하는 건 상관없다. 언제가 되어도 좋으니, 그 마지막 순간만큼은 한없이 사치스럽고 싶다.
재난이 일어났다. 여러 목숨이 순식간에 스러졌다. 새삼스럽지 않다. 서울에서도, 대구에서도, 바다 위에서도. 아니 세상 곳곳에서. 언제고 어디서고 일어났으며, 일어나고 있다. 예기치 못한 죽음이, 어이없는 죽음이, 황망한 죽음이 매일매일 생겨난다. 그런데도 나는 이런 일들을 접하는 것이 힘들다. 도무지 걷잡을 수 없이 우중충한 기분이 든다.
이런 날에는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돌아가시기 전날, 병원에서 나와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가는 할아버지를 아주 우연히 큰엄마가 마주치셨다고 했다.
“아버지, 이 시간에 이렇게 병원에서 나오시면 우짭니꺼. 빨리 다시 돌아가입시더.”
“아니, 나는 마 집에 갈란다. 인자 갑갑해서 더 못 있겠다.”
“아이고, 갈 때 가더라도 퇴원 수속은 해야 돼예. 내가 내일 오전에 퇴원시켜 달라 할 테니까 일단 가입시더.”
큰엄마는 빈소에서 유일하게 목을 놓아 어린애처럼 우셨다. ‘내가 마 그냥 집에 가시자 할 거를…내가 마 가시자 했으면 될 거를….’
온 동네 장례식장이 만실이 되고, 그러고도 모자라 뒤이어 줄을 서 있는 상황이었다. 시골의 장례식장까지 부리나케 달려올 수 있는 조문객은 많지 않았다. 대신 예상치 못한 죽음처럼 예상치 못한 조문객들만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TV에서만 보던 사람들이 찾아왔고, 나중엔 병원 관계자들이 찾아와서 무릎을 꿇었다. 우리는 아무도 미쳐 날뛰지 않았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자들에게 제공할 남아있는 마음이 없었다. 각종 포털 사이트의 메인 페이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누구도 집안 어른의 죽음을 세상의 가십거리로 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온 세상은 우리가 요청한 적도 없는데 함께 슬퍼했다. 그 관심은 고마운 일이라고 하기엔 부담에 더 가까웠다. 우리를 슬픔에 집중하기 어렵게 하였으며, 온전히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했다.
예기치 못한 참사에는 바로잡아야 할 숙제들이 숨어있을 수 있다. 그건 남은 세상에 주어지는 것이지 유족의 몫이 되는 건 아니다. 사실 유족의 몫은 상실감을 견디고, 견디어내는 것이다. 큰엄마가 아무리 ‘어제 아버님을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그냥 집에 모시고 갔더라면’ 하는 생각을 한들, 그것은 현실이 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멈추지 않는다면 큰엄마를 좀먹게 하는 일일 뿐이다. 아무리 돌이켜보고, 가슴을 치고, 세상의 멱살을 잡아 본들 꺼진 생명이 다시 타오를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발적으로 그 가상의 세계를 잠시 차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비슷한 얼굴을 한 사람들끼리 부둥켜안고 지리멸렬의 상태가 되어 공허함을 눈물로 메울 뿐이었다.
나는 사치스러운 죽음을 꿈꾼다. 그 어떤 꿈보다 허무맹랑하지만 여전히 포기하고 싶지 않다. 다른 꿈은 다 포기해도 이 꿈만은 붙들고 살길 희망한다. 내 가족, 내 아끼는 이, 내 아는 이가 아니라 세상 모든 죽음이 늦은 오전의 햇살처럼 빛나고 따사롭기를 바란다. 그렇게 나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죽음이 사치스러우면 한다. 그리고 이것이 사치가 아닌 일상적인 일이 되길 꿈꾼다. 탄생한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그 사건에 모두가 같은 크기의 아픔을 겪길. 그 앞에서 흐르는 눈물이 단순히 부재의 아픔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