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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정 Oct 06. 2022

완전한 동행은 없다

혼자서도 괜찮아

클래식자체 보다는 클래식 공연을 좋아한다. 뭐, 맥락자체는 비슷한데 심리적으로 둘은 결이 조금 다르다. 말하자면 나는 유달리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기보다는 장르와 관계없이 음악 자체를 사랑하는 편이고, 음원이나, BGM으로서의 음악보다는 공간 자체가 살아있는 음악으로 가득 메워지는 그 현장감을 좋아한다.


그런데도 유달리 클래식 공연을 즐겨보는 것도 사실이다. 꼭 클래식이 더 좋다기보다는 그 공연의 특성이 나와 잘 맞았던 면이 있다. 예를 들면, 뮤지컬은 한때 열심히 보았지만 같은 돈을 주고도 배우 컨디션에 따라 공연의 질의 차이가 심했다. 그러니 비싼 돈을 주고도 막상 공연의 질은 복권 당첨처럼 도무지 예측할 수 없어서 기대와 실망 사이를 넘나들다가 나는 그만 지쳐버리고 말았다. 콘서트는 그보다는 상황이 좋기는 했다. 하지만 음악 감상의 목적보다는 팬덤이 주를 이루는 공연장은 아무래도 기운이 차오르기보다는 빼앗기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 여차여차 하다 보니 클래식 공연을 유독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뿐이다.


아무튼, 처음 공연을 보러 다닐 때만 해도 나는 애타게 동행을 찾아 헤매곤 했다. “아아, 제발 한 번만 같이 가주라~ 내가 밥도 사줄게!” 그렇게 이리저리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대롱대롱 매달려 다니며, “혼자는 싫어! 혼자는 싫다고!”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클래식이라는 장벽은 남들에게 나만큼 쉽게 무너지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대부분이 거절로 이어졌고, 결국에 동행을 찾지 못하면 나는 아무리 아쉬워도 예매해둔 공연을 취소해버리곤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정말로 좋아하는 일은 혼자 하고 싶지 않아서. 이것마저 혼자 즐길 줄 알아버리고 나면 그때는 정말 뭐든지 혼자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 두려웠다. 그 이전에는 영화가 그랬다. 영화는 죽어도 혼자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누군가와 함께하면 불편해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내가 영 못마땅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쌍시옷(-었-)이 유독 자주 등장하는 것을 눈치채셨는가. 그렇다. 이마저도 과거형이 되고 말았다. 이제 나는 공연마저도 혼자 보러 다니게 됐다. 아뿔싸, 싶다가도 요즘이 더 좋다고 느낀다. 저 멀리서 엄마의 한숨 소리가 들려온 것 같은 건 기분 탓인가.


그래도 꾸준히 공연 보는 사람으로 지냈더니 요즘은 조금은 반가운 일도 생겼다. 가끔 “나 사실 클래식에 관심은 있는데,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모르겠어.”라고 먼저 물어오는 친구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아주아주 반갑게, 몇몇 공연을 추려서 추천한다. 입문자가 듣기에 좋은 연주회나, 어느 정도 실력이 검증되어 누가 들어도 좋을 법한 연주자를 소개하고 부담스럽지 않은 금액의 공연은 “같이 가볼래?” 제안하기도 한다.


사실 남들 바짓가랑이 붙들고 늘어지던 시절에는 종종 대놓고 불쾌함을 드러내는 친구들이 있었다. “너는 왜 싫다는데 자꾸 보자고 해서 사람을 불편하게 하니?”라고 되물어오면, 나는 몹시나 당황한 채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니 지금 잘 몰라서 그렇지 겪다 보면 무조건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지…….”라고 말하면서도 실은 나 역시 고개를 갸우뚱하고 말았다. 내가 좋아한다고 너도 당연히 좋아할 거라니, 이런 우격다짐이 또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렇다. 동행이라는 건 어쩐지 처음부터 끝까지 곁에 서서 함께 걸어가는 이미지를 연상케 하지만 사실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 온전한 동행이라는 건 없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나는 나 홀로 공연장에 앉아 그 순간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이제는 무조건 혼자인 것이 편하다기 보다는 그런 때는 그런대로 기껍다. 또 함께하고자 하는 이가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감사하다. 그와 매번 공연을 함께 즐긴다고 해서 그가 내 모든 순간의 동행은 아니다. 더 나아가서 그가 내 모든 공연 관람 때의 동행이 되는 것도 아니다.


내게는 가끔 퇴근길에 소주 한잔 걸치고 싶을 때의 동행이 있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 함께하는 동행이 있다. 같이 게임을 하며 시시덕거리는 동행이 있는가 하면 만나서 제법 속 깊은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위로하는 동행도 있다. 글을 통해 누구에게도 나눠보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얼굴은 몰라도 내면의 친밀감을 쌓아가고 있는, 그런 동행도 있다. 그렇게 여러 동행과 짤막하게 손을 잡았다가 놓고, 또 잡았다가 놓으면서 크나큰 안정감을 느낀다. 별 특별하지 않은 듯 어딘가 심심한 관계 속에서 더없는 만족감을 느낀다. 혼자가 두려워 종종걸음으로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던 때에는 갖지 못했던 것들이다. 그렇게 비로소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함께인 모든 순간이 소중하고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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