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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정 Jun 29. 2022

호상이 어딨어

죽음을 바라보는 고운 시선에 대하여

나는 이상하리만큼 유별나게 할아버지를 좋아했다. 할아버지가 나를 특별히 예뻐한 것도 아니고, 내게만 다정한 적도 없었다. 그냥 혼자서 짝사랑하듯 그렇게 좋아했다. 그는 ‘고고하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점잖은 어른이었고, 나는 그런 할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조부모 중에 가장 유대가 깊었던 외할머니를 떠나보내고서도 적잖이 울고 넉넉히 슬퍼했지만, 금세 일상을 회복했었다. 마지막 조부모여서 그랬는지, 유독 좋아해서인지, 급작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셔서인지, 그건 잘 모른다. 어쨌든 아직도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가끔 훌쩍훌쩍한다. 아, 어쩌면 사고 나기 보름쯤 전에 병실에서 ‘이번엔 정말 죽는 줄 알았다’고 하시던 할아버지의 얼굴에 내비친 안도감이 여전히 마음에 남아 그런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 노쇠하시고, 고생하시기 전에 딱 잘 가셨을지도 몰라.’

 ‘그래, 얼마나 정정하게 살다 가셨냐.’     


라고 했다. 잔뜩 붉어진 얼굴이 노기였는지 술기운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인물들이 저 멀리서 내뱉는 그 실언들을 들을 때마다 그가 나이가 몇 살이건, 누구이건 가서 싸대기를 연속으로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휘갈겨주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강풀 만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만석 할배가 장례식장에서 술잔 내동댕이치면서 ‘세상에 사람이 죽었는데 호상이 어딨냐’고 욕지거리를 해대던 장면도 머릿속으로 오십번쯤 시뮬레이션했다. 물론 현실은 눈앞의 소주나 원샷하고 말긴 했지만.     


사람들은 가끔 노인들을 마치 죽음이 예약되어있는 사람보듯 한다. 그건 노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같은 처지인 걸 알면서도 그런다.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어느 적정 길이를 넘긴 삶은 언제 세상을 떠나도 놀랍지 않은 일이 된다. 그의 생은 이제 그 이전의 모든 것들이 소멸하고, 그저 ‘얼마나 오래 병상에 누워있었으며’, ‘얼마나 병원비를 까먹었으며’, ‘얼마나 남은 가족을 괴롭혔는지’로 평가받는다.  

   

현실을 벗어날 방법이 없는 노인들은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한다. 이미 진작에 예약은 성공한 것 같은데, 대체 그게 언제인지 몰라 답답해 죽겠다는 모양새다.     


세상에 죽고 싶은 삶은 없다. 죽고자 살아가는 삶도 없다. 오직 죽고 싶은 환경이 있고, 죽고 싶은 상황이 있을 뿐이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살기 위해 발버둥 치기 마련이다.     

 

나는 행여 우리 할아버지의 죽음에 가장 슬펐던 사람이 할아버지 본인일까 싶어 요즘도 가끔 훌쩍훌쩍 운다. 만약의 만약이라도, 그것이 그에게 아주 조그마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싶어서.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살아 있다.

절대 마음속에서 미리 묻어서는 안 된다.     

  ─요시모토 바나나, <아르헨티나 할머니>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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