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린을 읽다가
2주 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문득 지금껏 써온 글들이 못마땅해지자, 장황하기만 했지 도무지 그 속에서 가치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자 할 말이 없어서도, 귀찮아서도 아니고 그냥 쓰는 일 자체가 영 무의미하게 다가왔다. 방출보다는 비축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자 나는 펜을 내려놓고 책을 들기로 했다. 이번 주 드디어 첫 참여를 하게 된 우리들의 작업모임에서 진득이 앉아 한 시간 동안 내리 책을 읽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 시간쯤 한 사람의 글에 골몰해보면 내게도 좋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결과적으로는 그렇다. 나는 단 세 페이지 만에 책을 내려놓고 말았다. 여자의 글에서는 찬란함과 처절함이 동시에 묻어났다. 나는 사소한 한 마디에도 이 여자의 온 생애를, 그리고 그 마지막을 떠올렸다. 여태껏 이랬던 일이 없는데, 이번에는 유독 이 여자의 글이, 생이 서글펐다. 도저히 더는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다.
산다는 건 참 어렵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결국에 살아가기를 중단한다. 전혜린의 삶은 불행했던 걸까, 아니면 충만했던 걸까. 이어령 선생은 그가 단 서른두 해를 살았지만 그야말로 온전히 생을 살아낸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맞다. 그 생은 온전한 것이었다. 매 순간이 더 나은 것을 위한 고찰이었고 집착이었고 열정이었다. 그러니 그는 비록 짧았고, 처절했고, 끝내는 불완전했지만, 그 덕분에 오히려 32년의 세월은 완전한 것이 되었다. 충분히 고개를 끄덕여 본다. 다시 사유한다. 어느새 32년의 생보다 더 오래 살게 된 나는 글쎄, 생을 온전히 살아내기는커녕 나날이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그러면 이 여자의 생과 나의 생의 가치는 다른걸까. 아니, 그렇다면 왜 나는 살고, 저 여자는 그런 형태로 생을 마감해야 했던걸까.
며칠 전 한 이십 대가 실종되었다고 했다. 요즘 나는 ‘그것이 알고 싶다’를 몹시 즐겨보는 터라, 괜스레 마음이 무거워져서 그가 꼭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랐다. 부디 나쁜 일에 연루되어 아픈 일이 있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그 다음날에 곧장 낙담해야 했다. 알고 보니 그는 이미 나쁜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마음이 아팠던 걸까? 어떤 힘든 일이 있었던 걸까? 언니를 위해 119에 신고한 것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예쁘기만 한 그 마음은 어쩌다 다쳐서 한강 다리로 향해야 했을까? 마음이 다시 그 언니에게로 간다. 그이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견뎌낼 수 있을까? 아니, 견뎌내야만 한다. 이겨내야만 한다. 이제는 그가 최대한 조금만 아프기를 빈다.
세상을 등지고 싶을 만큼 아픈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신호를 보낸다고 한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 신호를 모처럼 알아봤다고 한들, 반드시 그를 살릴 수 있는 걸까?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도 스러질 생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사람들이 말하는 그 신호라는 건 어쩌면 이미 늦은 뒤에야 발생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남은 이들이 안타까울지언정 죄책감 속에서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나는, 내 곁에는 전혜린과 같은 너무 크게 불타올라 쉬이 꺼지는 이가 없다면 좋겠다. 너무나 여리고 연약해서 기댈 힘도 없이 추락하는 이가 없다면 좋겠다. 울기는 쉽지. 웃음은 어려운 것. 어쩌면 우리는 반대로 오해한 채로 어렵게 울어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은 웃음이 어려운 것. 그렇기에 웃음은 삶. 그렇게 어렵게 웃으며 살아내는 우리의 삶은 위대한 것.
삶이 하도 치열해서 울지 못하는 많은 이들이 더 많이 울기를. 어렵게나마, 희미하게나마 웃고, 쉽게 울기를. 그렇게 완전하지 않아도, 휘청이면서도 부디 내일로 나아가기를.
웃음은 어려운 것
그러나 웃음은 삶
그리고 우리의 삶은 그처럼 위대한 것
루이스 휘른베르크, 울기는 쉽지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