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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윤 Feb 19. 2024

캐리어와 총각김치

2015년 1월, 밀라노 두오모에서……


2015년 1월 무렵의 일이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 고전 문학을 가르치시던 고순희 교수님이 당시 내가 사는 곳 근처로 오신다고 이메일을 주셨다. 겨울 방학을 기회 삼아 여행을 오신다고.


‘응? 교수님께서?’


아직도 나같은 학생을 기억해 주시다니…….


그렇다. 나는 대학 때 쌩 날라리였다.


핑계는 있다.


가고 싶었던 서울의 이름난 대학의 원하는 학과에 수시와 정시에 두 번 모두 합격했지만, 부모님의 반대는 거셌다.

“서울의 사립대라니? 부산의 국립대를 가라. 동생들 생각도 해야지.”


나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쌩 날라리가 되었다. 대학의 스쿨 밴드에 들어가 드럼을 뚱땅거리고 노래나 부르며 학과 생활과 학업은 나 몰라라 했다.

수업에 들어가지 않는 걸 그 당시 은어로 ‘짼다’고 했는데, ‘수업을 째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당시 내게 재미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스쿨 밴드에서 노래를 부르며 여기저기 공연을 다니는 일뿐이었다.


그런 쌩 날라리가 생뚱맞게 ‘고전 문학’ 공부라니?


고순희 교수님이 개설한 수업은 <민요의 이해와 실제>였다. 당시 나는 2년 동안의 스쿨 밴드 생활을 끝내고 MBC 마당놀이를 연출하던 손진책 선생님이 대표로 있던 극단 미추에서 연극 공부를 하고 복학한 상태였다. 연극 학교에서 김성녀 선생님께 일주일에 한 번 아침마다 판소리를 배웠던 지라, 날라리인 내가 학교에 다시 발을 붙이기에 민요 수업은 꽤 결이 잘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학 전 2년 동안 학과 공부는 나 몰라라 했기 때문에, 국문학 전반의 기본 개념은 전혀 닦이지 않은 상태였지만, 교수님의 자세한 설명과 매번 함께 후반 수업을 진행하시던 민요 전문가 선생님의 가창 수업은 내게는 큰 즐거움이었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대학원 진학까지 할 수 있었던 데는 고순희 교수님의 민요 수업 공이 크다. 공부에 다시 재미를 붙이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나의 날라리 기질은 어디 가지 않았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대학원도 가고, 고등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며 교사 생활도 몇 년 했지만, 고순희 교수님을 수년 만에 다시 뵌 2015년 1월, 나는 뜬금없이 이탈리아 토리노에 살고 있었으니까.


몇 년 동안 뵙지 못 한 교수님이 이탈리아에 오시고, 나 같은 쌩 날라리 학생도 떠올리고 안부를 전하시는데, 기차로 몇 시간 걸리지도 않는 근처 도시에 살면서 어찌 만나 뵈러 가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런데, 지윤아. 올 때 캐리어를 챙겨 오겠니? 별 건 아니지만, 너한테 주고 싶은 게 있다.”


교수님은 이상하게도 캐리어를 꼭 챙겨 오라고 여러 번 당부를 하셨다. 교수님을 뵈러 가는데 캐리어라니? 아마도 한국 서적을 가지고 오신 게 아닐까 막연히 생각했다.


교수님의 당부대로 나는 덜컹거리는 빈 캐리어를 끌고 밀라노에 도착했다.


인파로 북적거리는 밀라노 두오모 앞에서도 새빨간 도톰한 점퍼에 니트 모자를 쓰신 교수님을 한 번에 찾을 수 있었다. 함박웃음으로 인사를 나누고, 밀라노 두오모 꼭대기의 새하얀 대리석상들이 눈을 가득 채우는 리나쉔떼 백화점 정상 테라스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리를 옮겨 젊은이들이 가득한 나빌리 지구에서 아페리티보도 한 잔 하고 나니 짧은 겨울 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순식간에 주위는 어둠에 휩싸이고 추위는 거세졌다.


“춥다. 이제 가자. 돌아가는 기차 타기 전에 내 숙소에 잠깐 들렀다 갈래?” 교수님이 머무르시는 밀라노 중앙역 근처 호텔로 갔다.

 

“자! 가지고 가렴. 캐리어에 넣어보자. 들어가겠지?”


하얗고 커다란 스티로폼 박스가 비닐에 몇 겹으로 싸여 있었다.


“총각김치야. 얼마나 먹고 싶었겠어? 내가 담은 건 아니다.”


세상에...... 내가 가지고 간 캐리어가 가득 차는 양의 무거운 총각김치를 한국에서 밀라노까지 캐리어에 넣어 오시다니! 날라리 학생에 날라리 교수님이 분명하다! 아무리 꼭꼭 싸매도 분명히 김치 냄새가 커다란 수하물 캐리어 전체에 다 배었을 텐데...... 겨울 여행이라 옷들도 부피도 무게도 많이 나갔을 게 분명한데...... 두꺼운 겨울 여행 옷가지에 김치 냄새가 풀풀 나니 여행하는 내내 얼마나 눈총을 받으실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자, 어서 가라. 밤도 늦었고, 기차 놓칠라.” 커다란 총각김치 박스를 아무것도 아닌 듯 툭 하고 건네듯이 작별 인사도 깔끔하고 무심했다.            


교수님이 한국에서 직접 가져다주신 새콤하고 아삭한 그 총각김치는, 어느덧 10여 년째 이탈리아살이를 하고 있는 지금도 그 쿰쿰하고 정겨운 냄새를 폴폴 풍기며 내 가슴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위의 글은 <월간 에세이> 2023 12월호에 게재되었음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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