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한달살이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앤과 나는 기차를 타고, 동해 묵호역에서 내려 앤의 친구 홍을 만났다. 강릉 한달살이를 괜히 시작한 것 같다는 나의 우울한 소리에, 앤은 친구와의 약속에 나를 끼워줬다. 동해에 살고 있는 홍은 말수가 적지만 살뜰하게 우리를 챙기고, 동해 묵호의 곳곳을 소개시켜주었다.
우리는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노을을 구경했다. 해가 반쯤 저물었을때 우리는 묵호 논골담길에 갔다. 차에서 내리니 논골담길의 집들을 아기자기하게 올려둔 소품샵이 있었다. 동화 같은 분위기를 가진 그 가게에 들어가니, 동화같은 삶을 살고 계시는 부부 사장님이 계셨다. 노오란 유니폼에 귀여운 토끼, 기린 모자를 쓴 다정한 부부였다. 가게 구경을 끝내고 아래로 내려가니 동해와 논골담길이 한눈에 보였다.
산동네에 작은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가로등이 켜져 있는 모습, 그리고 해가 완전히 저물기 직전의 시간은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과거 묵호항은 오징어로 큰돈을 많이 벌었지만, 지금은 쇠퇴한 조용한 동네다. 저물어가는 동네의 애환이 느꼈다.
쓸쓸하지만 포근한 불빛들이 묵호를 밝히고 있다.
아, 이토록 평범한 동네가 서정적으로 느껴지다니. 정영주 작가의 작품이 생각났다. 이 동네가 그 작품처럼 느껴졌다. 난 단 한 번도 이런 동네의 풍경을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논골담길과 비슷한 부산 감천마을을 여러번 갔음에도 그 곳이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랬던 나도 예술을 통해 이곳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그 그림들을 봤기에, 내가 그 그림들을 아름답게 느꼈기에, 이 풍경에 더 이상 지나칠 수 없었다. 예술이 일상으로 들어온 순간이었다.
나는 고흐를 좋아했다. 그래서 고흐를 따라 프랑스의 여러 미술관을 방문하고, 그의 그림이 배경이 됐던 오베르쉬르아즈와 아를도 방문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 실망했다. 고흐의 그림과 달리 실제 모습은 초라했고 작고 볼품없었다. 현실보다 그림이 더 멋있다니. 원래의 모습에는 감탄하지 않으면서 고흐의 붓 터치에 감탄하는 나를 보며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느꼈다.
이젠 알겠다. 예술은 그런 것이다. 일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그냥 지나치게 두지 않는다. 예술가들은 남들이 지나치는 사소한 것들로부터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남들과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그들이 느끼는 아름다움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예술의 것들로부터, 세상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곤 존재의 가치를 깨닫는다. 그래서 예술이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 떠났던 프랑스에서부터 먼 길을 돌고 돌아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예술은 그래서 존재한다. 일상의 것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