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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Park Sep 06. 2023

온전한 나를 찾기 위해 완전히 나를 잃다

내게 눈치를 주는 나 자신 떼어 놓기

    K 장녀의 운명을 타고난 나는 자발적으로 눈치를 보며 자랐다. 내가 나에 대한 기억이 없을 때부터, 내가 스스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갖기 전부터 나는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기대 한 톨씩을 심어주며 자랐다. 키우기 쉬운 아이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부모님은 그래도 나를 키우는 데 별 무리가 없이 내가 얌전히 잘 자라주었다고 하셨다. 그런 말들은 기대라는 씨앗에 비료가 되고 물이 되었나 보다. 나는 자라면서 점점 더 '키우기 쉬운' 딸이 되고 싶었고,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던 것 같다. 간혹 깜빡이를 켜지 않고 비뚤게 굴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엄마가 하는 말씀들이 대부분 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고 곧 다시 차선 안으로 돌아왔다. 그랬더니 그 씨앗이 넝쿨넝쿨 자라서 스스로에게도 또 부모님에게도 어떤 울타리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알아서 잘하는 애, 말 잘 듣는 애라는 간판 뒤에는 늘 좀 다르고 싶은 면모가 있었던 것 같다. 조금 돌발 행동을 해 볼까 싶어 고등학생 때에는 선생님과 부모님 양쪽 몰래 기숙사를 탈출하기도 했다. 그래 봐야 친구들하고 찜질방 가서 하룻밤 자고 오는 거였는데도 여하튼 그때는 스스로에게 엄청난 탈선이었다. 대학생 때에는 재무관리 수업이 정말 너무 나랑 맞지 않아서 출석 체크가 끝나면, 아니, 내 이름이 불리자마자 두 학기 내내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물론 성적으로 탈선의 티가 나면 안 되기 때문에 시험공부를 미친 듯이 해야 했기는 했지만. 어떤 날은 토익 학원 수업을 가다가 갑자기 버스에서 내려 다른 곳으로 가기도 했다. 남들이 봤을 때 저게 탈선이라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나에게는 큰맘 먹고 했던 일들이었다. 글쎄, 다르고 싶은 면모라기보다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원래의 내 기질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내가 자아가 생기기 전에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성질 같은 것 말이다.


수능을 두 번 다 망치고 대학에 들어갔을 때, 처음에는 모든 것을 잃은 기분이었다. 몇 년이고 내가 해 온 것들이 부정당했는데도 탓할 것은 수능 앞에 무너진 내 얇은 정신, 나 자신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생각보다 좌절의 기간이 그렇게 길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어떻게든 살아 나갈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나 보다. 엄마는 반수든 삼수든 하라고 하셨고, 더 이상 수능에 매달리고 싶지 않다는 나를 보며 저건 속도 없이 어떻게 그런 학교를 다니냐고 타박하셨다. 나는 남은 것 없이 모든 것을 잃은 심정이었지만, 잃었기에 다시 채울 수 있었던 것 같다. 경영학과 학생으로서 시각 디자인과를 복수 전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당시에는 그게 허용되는 학교가 꽤 드물었다. 오히려 수능을 평소대로 봐서 '괜찮은' 대학교에 들어갔더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비워진 스스로를 디자인 공부로 다시 채워 넣을 수 있었다.


미국에 오는 과정도 그랬다. 해외 살이를 해 본 것도, 여행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었으면서 나는 어떻게든 미국에 오고 싶었다. K장녀의 운명에 교환학생을 가는 것 역시 부모님께 부담이라는 생각이었고, 또 어쨌든 디자인학과와 경영학과를 복수 전공하려면 학과 스케줄 상 교환학생이라는 시나리오가 맞지 않았다. 하지만 교환학생이라는 기회를 잃은 자리에는 해외 인턴십이 채워졌다. 결론적으로는 인턴십을 시작으로 단기 교환학생이 아닌 '미국살이'가 시작되었으니, 잃은 뒤에 오히려 더 내가 꿈꾸던 방식으로 온전해진 셈이다.


    내 것을 하겠다고 선언한 지 7주 차가 되었고,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그 어느 때보다도 캄캄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분명히 하루하루 바쁘게 보내고 있고 내가 하고 싶던 것들을 해 나가면서 살고 있는데 도저히 아웃풋이 나오지를 않는 거다. 며칠 전까지는 내가 홀로 선 지 3개월은 되었다면서 스스로를 불안 속으로 더 밀어 넣었는데, 주수로 세어 보니 석 달이 아니고 6주였다. 두 달은커녕 한 달이 조금 지난 것이다. 한 달 만에 뭔가가 나오기를 바랐다니 스스로도 좀 머쓱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조바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 상황에 대해 그 아무도, 남편도, 시부모님도, 친구들도, 이제는 부모님도 눈치를 주지 않으시는데 대체 나는 무엇에 좇기고 있는 것인지. 물론 통장 잔고에 좇기고 있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다음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은 아닌데 말이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잃고 있다고 생각했다. 남의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더 이상은 끌려다니고 싶지 않다고 스스로 선을 그었으면서도 막상 직장이 없다는 사실에 어떤 상실감이 생겼던 것 같다. 안정을 잃었다. 따지고 보면 누구라도 언제 잘릴지 알 수 없는, 그렇게 안정적이라고 할 수만도 없는 게 회사 생활인데도 그 '안정이라는 탈을 쓴 생활'마저 내가 '잃어버린 것' 중 하나가 되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 꿈꾸는 생활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또 지금 당장은 그 어떤 수익도 발생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에 어쨌든 통장의 잔고도 줄어가고 있다. 잃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대해 눈치를 주고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제안 들어왔던 일을 계속해 나갔다면 나는 올해 내 커리어 상 가장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랬다면 어쩌면 처음으로 남편과 나는 조금은 여유롭게 한 해를 보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고 싶었던 곳에 가고 사고 싶던 것들을 고민을 덜 하며 사고. 그런데 그런 기회를 나는 잃었고, 잃기로 선택한 것은 나 자신이었기 때문에 저편에 있던 또 다른 내가 계속 스스로를 쪼아댄 것이었다. 어쨌든 언젠가는 이랬어야 했는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보고 찾아보려면 인생의 어느 시점이건 이런 상황에 나를 던지게 되는 건 필연적인 사건인데 말이다. 나는 그걸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를 무책임한 사람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책임감이 없는 사람을 보는 시선이 누구보다 차가운 나인데, 이제 내가 그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조바심은 언제든지 나를 삼켜버릴 태세로 내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이번 생은 망했으니 이쯤에서 리셋 버튼을, 이쯤에서 전원 종료 버튼을 눌러야 하는 건 아닐까?


    지난 주말 나는 스튜디오로 쓰고 있던 방의 레이아웃을 재배치했다. 오피스로 쓰던 방의 책상을 스튜디오로 옮기고 두 방에 흩어져 있던 이런저런 것들을 바꾸어 보았다. 내가 제일 아끼는 공간(스튜디오 방)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 내 영혼이 조금은 숨통을 트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뺄 것은 빼고 채울 것은 채우다 보니, 놀랍게도 오피스로 쓰던 방이 다시 하나의 빈 캔버스 같은 공간이 되었다. 늘 뭐가 많아서 방이 두어 개쯤 더 있는 집이었으면 어땠을까 했었는데 말이다. 더 이상 무언가를 더 놓기에는 공간이 없다고 느꼈던 스튜디오도, 레이아웃을 바꾸고 나니 이젤을 들여놓고 작업할 정도의 공간까지 충분히 생겼다. 스튜디오의 기존 구조를 '잃음'으로써 결과적으로 방 두 개를 '얻은' 셈이 된 것이다. 이제 나는 오피스로 쓰던 방을 게스트 룸으로 꾸밀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조금 들떠 있다.


'잃었다'는 말이 이제는 '위로'로 탈바꿈하는 중인 것 같다. 놀랍게도 나는 이 글을 쓰면서 그걸 깨닫는 중이다. 처음 일을 그만두기로 했을 때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전혀 걱정하지 않고 대신 응원을 해 주었다. 그동안 내가 해온 것들, 살아온 모습을 보면 나는 또 어떻게든 해 낼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굳이 믿지는 않았다. 응원은 고마웠고 그런 사람들이 내 곁에 있다는 게 행운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냥 본인들의 삶이 아니니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아마 그게 사실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잃음으로써 얻은 경험이 있다. 오래되어서 잊고 살았을 뿐이다. 지금의 나는 이제 거의 다 잃은 것 같다. 그것은 곧 정말 순수하게 내가 원하는 것들, 천진난만하게 해 보일 수 있는 것들로 나를 완전하게 탈바꿈할 수 있는 시기가 오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온전한 내가 되었을 때, 그런 내가 원하는 것들을 어떻게든 끌어당겼던 경험을 나는 갖고 있고, 이번에도 그렇게 된다고. 믿을 수 없는 것들을 믿게 되는 시간이 거의 다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급한 마음을 늦추는 게, 여유를 가지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이 되겠지만 어쨌든 나는 온전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나를 완전히 잃어버릴 것이다. 그동안 나를 못살게 굴었던 많은 혼잣말들과 의심들, 불안을 완전히 잃어버리려고 무던히 애를 쓸 것이다. 그리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될 거야. 어떤 내가 나에게 계속 눈치를 준다면 설령 그게 나일지라도 나는 그 애를 놓는다. 내 눈치를 가장 많이 보는 것이 나이기 때문에. 온전한 나를 위해선 나를 떼어버리고 잃어버리는 것도 필요할지 모른다.


하고 싶었는데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들, 오글거린다고 생각했던 것들, 나는 그 정도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던 생각들을 이제는 다 잃어버리자. 놓쳐버리자. 그 정도가 되든 안되든 과정을 즐기면서, 온전한 스스로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줘 보자. 온전한 내가 되기 위해 채워지는 것들을 받아들이자. 이제는 모든 타이틀을 '잃어버리'고 그 누구도 아닌 상태에서의 나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해 보기로 한다. 그리고 이 글을 읽어 주신 누군가도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다면 이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고 온전한 스스로를 만나게 되실 수 있기를. 우리 모두 열심히, 완전히 잃어버리고 온전한 스스로를 만나게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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