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님이 오랜만에 한국에서 방문하셨다. 예전엔 시부모님이 일 년에 한 번씩은 다녀가셨는데, 시아버님 건강이 악화되고 그리곤 삼 년 전 세상을 떠나신 후 시어머님의 첫 여행이었다. 남편이 맏아들인지라 새집을 지어 이사하면 보러 오시라고 날마다 전화를 드렸었고, 시누이도 약해지신 어머님을 염려해 동행해 왔다. 미술관을 좋아하시는 어머님과 시누이를 위해 뉴욕 여행을 함께 떠났다. 2박 3일의 일정으로 휘트니(The Whitney), 메트 (The Met), 모마(MOMA: 뉴욕현대미술관)를 둘러보고 저녁에는 뮤지컬도 보고 점심, 저녁으로 유명한 맛집을 찾아다니며 먹고 알찬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휴가를 얻어 운전사를 자처하고 나선 남편이 뉴욕에서 내려오는 길에 한 주유소에 들렀다. 전기차를 충전하는데 20분 정도 소요가 되니, 주유소에 딸린 가게 안으로 들어가 쉬며 스낵이라도 먹자 했다. 가게에 들어서니 고소한 튀김 냄새가 솔솔 휘감았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프라이드치킨(The World’s Most Famous Fried Chicken)”이라는 커다란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가게 음식을 주문하는 카운터 위에 걸려 있었다. 치킨 다리 네 개만 사서 맛보자며 주문했다. 다리는 이미 다 팔리고 없다며 허벅지살 네 조각을 받았다. 건강을 고려해 기름을 적게 쓴 에어프라이와는 거리가 먼, 조금 짜면 기름이 뚝뚝 떨어질 듯 묵직했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는데, 치킨 한 조각씩을 들고는 말도 없이 순식간에 모두 먹어 치웠다. 평소 건강을 생각해 소식하시고 우리에게도 항상 조금씩, 좋은 것만 먹으라고 강조하는 어머님께서 말했다. “정말 맛있게 먹었다. 뉴욕 와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게 먹었네.” 옆에 앉은 시누이가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정말?! 비싼 집에서 중국요리며, 일식이며 대접했더니, 주유소에서 만 원짜리 치킨이 제일 맛있다고요?” 남편은 그런 시누이에게 말했다. “누나는 한국에 엄마 곁에 살면서 엄마 이런 것 좀 사드리지, 뭐 했어?” 그러자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아니, 네 아버지가 어린 시절 닭 잡는 걸 본 후 평생 닭을 안 드셔서 닭요리를 안 먹었는데, 가끔 프라이드치킨이 먹고 싶다 하면 KFC에 데리고 가셨더랬어. 거기서 난 치킨 먹고 아버지는 비스킷 먹곤 했는데, 그 생각이 나네. 한국에서 이번 여행을 떠나올 땐, 이젠 돌아가신 네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 내 맘대로 살자고 작정하고 나섰는데, 막상 어딜 가든 네 아버지와의 추억이 떠올라.”
어머님의 얘길 듣자니, 이십여 년 전 텍사스에서 사귀었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2000년 봄이었다. 삼 년간 의학 연구소에 파견 나왔다 돌아가는 일본 가족이었는데 초등학교 1학년과 유치원생인 두 아들을 데리고 네 식구는 봄방학 동안 서부 여행을 다녀왔다. 일본으로 귀국하기 전 아이들에게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주기 위해 좋은 호텔에 묵으며 미국의 광활한 자연을 보여주겠다고 헬리콥터를 타고 그랜드캐년을 들러보고 온갖 쇼도 보고 돌아왔다. 아이들 엄마인 시호코가 여자들끼리 모이던 모임에서 말했다. “그렇게 일본에선 할 수 없는 온갖 경험을 갖게 하겠다고 돈도 많이 쓰고 다녀와서 애들한테 ‘뭐가 제일 좋았냐?’고 물었어요. 근데 애들이 뭐랬는지 짐작해 보세요. 글쎄 호텔 수영장에서 둘이 장난치며 물놀이한 게 제일 좋았대요. 그런 건 저희 집 앞마당에서도 할 수 있는데 말이에요.”
그렇다. 제일 맛있는 것은 비싼 고급 레스토랑에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와 마주 앉아 나눠 먹는 소박한 음식이고, 제일 즐거운 순간도 남들이 못해본 별난 구경이나 재미가 아니라 마음 맞는 이와 유쾌하게 웃는 때이다. 동화 속 한 어부의 미소가 떠오른다. 행복을 찾아 배를 타고 바다 건너 온 세상을 돌아다닌 후, 고향의 바닷가로 돌아와 낯익은 풍경과 자신의 집에서 비로소 행복은 늘 자신의 익숙한 일상에 있음을 깨달은 한 어부의 이야기였다. 동화책 마지막 장은 자그마한 자신의 집을 바라보며 주름지고 햇살에 그을린 얼굴에 활짝 핀 그 어부의 미소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나도 여행에서 돌아와 내 작은 뒷마당에 앉아 따스한 햇살에 반짝이는 초록의 숲을 바라보며 숲 속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니, 내 얼굴에도 그 어부처럼 환한 미소가 피어난다.
(2023.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