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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음 Oct 20. 2024

목욕탕에서 첫 문장의 중요성을

(뭐 이런 때가 많이 나오는 얘기를 ....)

온몸이 쑤시 날씨는 흐렸던 그날.

목욕탕에서 호사를 누려보기로 했습니다.

세신사분에게 나의 몸을 맡긴 채 

때를 밀었던 첫 번째 경험이 어찌나 낯설고 어색했던지.

두 번째에는 다짐을 했지요.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고 얻은 기회인 만큼... 일단 누리자'

50대로 보이는 세신사분에게 만나자마자,

최대한 어색하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런 부탁을 드렸습니다.

"제가 추위를 많이 타서요.

중간중간에 따뜻한 물을 뿌려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특별히 어렵지 않은 부탁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세신사분의 퉁명스러운 답변에 당황했습니다.


"물 뿌리는 거 아니에요-"

  

그래도 다행스럽게 세신사분은 따뜻한 물을 적신

수건 한 조각을 몸에 덮어주셨지요.

그러나, 세신사분의 열정적인 때 미는 손놀림에

곧 사라졌습니다. 문제는 추위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쌓이는 때였습니다.

내가 누워있던 때밀이 침대 위에 

몸에서 후두둑 후두둑 떨어던 그것이 쌓여갔고.

그 위에서 좌로, 우로 몸을 굴려야 하는 상황으로 인해 

찝찝함이 몰려오더군요.


'한 번만 물을 끼얹어 주시면, 쌓인 때도 사라지고

깨끗한 느낌으로 누워있을 수 있을 텐데...'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서 부탁드렸어요.

제가 누운 곳에 쌓인 때가 많아서 찝찝하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한 채 말이지요.


“추워서 그러는데 물을 뿌려주시면 안 될까요?”


세신사분은 짜증이 한가득 섞인 목소리로 한소리를 하셨지요.  

“그렇게 물 뿌리며 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다음부터, 세신사분의 손끝이 거칠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몸이 거칠게 다뤄지고 있다는 슬픈 그 느낌.

예전 같으면,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떠올리며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왜 저렇게 짜증을 내나. 너무하시다.

그냥 일어나서 갈까 하며 불평불만이 화로 번졌을 수도 있었지요.

화를 낸다면, 나 자신에게 모처럼 선사한 이 호사의 시간도

화와 함께 타버릴 것 같기에 마음을 다독였습니다.


시간은 더디 가고, 이제 끝날법도 한데 세신사분이

한번 더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면서 때를 밀기 시작하셨습니다.

'혹시 내 때가 너무 많아서...? '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도 들더군요. 용기 내서 그런 마음을

나눠보기로 했습니다.


“제가 때가 많아서 힘드시죠.”

잠시 후 세신사분은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이유를 설명해 주시군요.

“때를 밀다가 물을 뿌리면, 때가 안 밀려.

때랑 때가 만나야 때가 밀리는 건데...”


전보다 훨씬 친절해진 세신사분의 말투에 한번 더 용기를 내서 왜 그런 부탁을 드렸는지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목욕탕에서 때를 밀어주셨던 분이

물을 뿌리면서 때를 밀어주셨던 기억이 있어서요.

그때 생각을 하면서 물을 뿌려달라고 그랬네요.”


“그럼 그 이후에 세신  안 해봤어요?”

“제가 피부에 알레르기도 있고, 해서 그냥 제가 살살 밀고.. 아니 거의 때를 안 밀었어요."

"피부에 알레르기 없고 좋은데 뭘..."


몇 마디의 대화만 나눴을 뿐인데

세신사분과 나 사이의 공기가 드라마틱하게 달라졌습니다.




때를 시원하게 밀고, 뜨근한 탕에 들어가 앉아있다 보니

세신사분과 나눴던 대화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더군요.


세신사분에게 건넨 나의 첫마디는

“뜨거운 물을 자주 뿌려주세요”라는 부탁이었어요.

나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요구처럼 느껴졌지만,

세신사분의 상황에서는 어떤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인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 말이 세신사분에게는 자신이 맡은 일을 잘 해낼 수 없게 만드는  말처럼 들릴 수 있었으니까요.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의 말은

세신사분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세신사분의 불편함이 툭툭 흐르는 행동으로 인해

나 또한 기분이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지요.

왜 그런 상황이 만들어졌는지도 모른 채 말이에요.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며 늘 강조하고 했는데,

“얘들아, 첫 문장이 중요해. “

그런데 글만이 아니었습니다.


낯선 누군가와의 첫 만남에서도

첫 문장이 중요했습니다.

낯선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낯선 그가 있는 곳으로 내가 첫 발을 내딛는 상황이라면

건네는 첫 문장은 더욱더 중요합니다.


나의 첫마디로 인해 상대는

나에 대한 판단을 90퍼센트까지 끝낼 수도 있으니까요.

특히, 나에 대해 사전정보가 없는 사람이라면 나의 첫마디로

많은 부분을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의도하지 않게 어그러져 버린 낯선 관계에서

해결 방법도 있었습니다.




그런 의도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상대를 불편하게 만든 말을 던졌다면,

나 또한 상대에게서 불편한 말을 받기도 합니다.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불편한 말을 들은 내가 '뭐지?' 하는 마음으로 다시 불편한 말을 던진다면,  악순환은 반복되겠지요.

악순환을 끊어야 합니다.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목욕탕에서 세신사분과의 대화에서 배운 방법은

이것이었습니다.


“제가 때가 많죠. 때가 많아서 힘드시지요..”


내가 먼저 마음의 고개를 숙인다면,

(상대가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

긍정적인 반응이 오지 않을까요?


세신사분에게 불편함의 공기를 깨는 한 마디를 건네지 않았다면 나는 묵은 때에 불편한 마음까지 버무려진 때밀이 침대 위에서 뒹구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고개 숙인 말로 상대의 마음이 잠시 열렸다면, 그 틈을 이용해 설명해야 합니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어린 시절의  나의 목욕탕 추억이 그분에게 훈훈한 이야기로 들릴 줄이야.)


스쳐 지나치는 관계에서도

하루의 행복도 맛볼 수 있고,

하루의 불행도 느낄 수 있기에

질문하게 됩니다.


낯선 당신과 나 사이에

따뜻한 공기를 만드는 첫 문장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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