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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셔블 밝은 달에 Jun 20. 2020

경주의 맛 2

오늘은 면 먹으로 봉황대에 가 볼까? by 진연


봉황대를 거닐다 보면 이곳이 지구인가, 소행성 2897 쯤 되는 우주의 한가운데인가. 싶을 때가 있다. 아파트 3층 높이의 능이 아파트 단지처럼 모여있는 풍경이 지구에서조차 흔한 게 아니니까. 능과 나무의 조화가 어릴 적 읽었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별이랑 닮아서 봉황대 앞에서 목도리의 반을 늘어뜨리고 어린 왕자 포즈로 사진을 찍은 적도 있다. 무엇보다 신비로운 건 보아뱀을 품은 모자를 알아보지 못한 어른처럼 우리도 능 안에 담긴 진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잘난 현대인이라도 그 앞에선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독특한 풍경 때문에 경주의 능들 중에서도 빼먹지 않고 들러야 할 곳으로 손꼽히는 곳. 봉황대를 나와 같은 '현지인'이라면 다르게 활용할 수도 있다. "비도 오고 면이 땡기는데, 능 앞에서 볼까" 하고.


이럴 때의 봉황대는 누구나 알고, 눈에 띌 수밖에 없는 '만남의 장소'다. 조상님 덕분에 더없이 멋진 약속 장소를 가진 셈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경주에서 가장 맛있는 칼국수를 먹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확하게는 봉황대에서 경주 법원 방향으로 5분쯤 걸어내려가야 하지만. 같은 동네라고 치고.

2014년에 문을 연 이곳은 시골 칼국수로 불려 오다 최근 인테리어를 새로 하면서 이름을 바꿨는데 황남동이어서 <황남 칼국수>다. 심플 이즈 베스트! 라더니. 맘에 들었다. 하지만 팬심이 넘쳐 이런 주접을 떨긴 했었다.


"기왕이면 도로명을 붙여서 봉황 칼국수라 하지. 맛이 봉황급이잖아."


농담처럼 들렸을 진 몰라도 '궁서체'였고, 오버 아니냐 했던 지인들도 한 입 먹고 나선 웃음기 하나 없이 쌍 엄지를 들며 동의해줬다.


일단 문을 열고 들어서면 주방까지 한눈에 보이는데 정말 너무 깨끗하다.

반짝반짝 빛이 나다 못해 몽골 초원에 가면 이처럼 눈이 시원할까. 그랬다. 진짜. 리얼.


개인적으로 밀고 있는 맛집에 관한 법칙이 하나 있는데 일명 청소 비례의 법칙이라고, 깨끗한 집일수록 맛있을 확률도 높다. 청소마저 완벽해야 하는 성격인데 음식에 들어가는 야채 하나라도 못나게 썰까. 맛의 아주 작은 빈구석을 용서할까. 지금껏 이 법칙을 깬 식당을 만나지 못했고, <황남 칼국수>는 그중에서도 대표 격이다.

이 집에서 청소만큼이나 내 맘을 흔들어 놓은 건 찰지고도 찰진 반죽.

찹쌀가루를 섞어 숙성시킨 건 기본이고 유난히 풍미가 좋다 했더니 마늘도 들어갔다고.

쫄깃 탱글 하면서 밀가루 특유의 향이 없는 면은 칼국수를 사랑하지만 소화가 안돼 고생하던 나에게 면치기의 기쁨을 알려줬다.

하지만 <황남 칼국수>의 놀라운 점은 이처럼 놀라고 있는 와중에 또 놀라게 된다는 점에 있다. 면발이 최고! 라며 칭찬을 쏟아내다가 이내 섣부른 1등을 주었구나! 를 깨닫게 만드는 국물이 있다. 대표 메뉴인 들깨 칼국수는 물론이고 북어 육수 칼국수, 얼큰이 칼국수, 계절 메뉴인 매생이 칼국수마저 예외는 없다. 뻑뻑함이 싫어서 들깨칼국수를 거부하던 누구도 이곳에서만큼은 그릇째 들고 마셨다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전설도 있으니. 어쨌든. 상상을 해 보자. 들깨의 고소한 향과 육수의 시원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국물과 입 안을 요동치는 면에 과일양념으로 버무렸다는 겉절이를 곁들이면 어떤 맛이겠는가. 요가의 대가께서 흔들림 없이 전사자세를 했을 때처럼 완벽한 밸런스를 이룬달까. 딱히 칼국수가 당기지 않는 날에도 이곳이라면 맛있게 비울 수 있다.


그러므로 메뉴를 고민할 필요가 없던 날들이었다. 묻지 말고 '칼국수', 무조건 '칼국수'니까. 칼국수와 함께 했던 무수한 날들에 후회란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야 <황남 칼국수>를 즐기는 완벽한 방법을 알게 되었으니 오랜만에 서울에서 내려온 동생과 함께 한 식사자리였다. 1인 1 칼국수만으로도 양은 충분해서 여느 때처럼 면과 국물과 김치와 밑반찬을 찬양하며 먹고 있는데, 호기심이 일었다. 이 정도 솜씨면 딴 메뉴도 맛있을 것 같았고. 마침 메뉴판이 옆에 있었고. 그 안에서 청양고추 부추전과 막걸리를 발견했을 뿐이었다. 남겨도 먹어보자며 전과 막걸리를 주문하고 나니 밑반찬으로 나온 아삭 고추마저 기가 막힌 안주가 되면서 그렇게 과체중의 길은 멀지 않더라는 얘기다. 바삭바삭 소리가 asmr을 틀어놓은 것처럼 인위적으로 들려서 우리끼리 "이 소리 들려?"를 몇 번이나 했는지. 옆자리가 멀어서 그나마 덜 부끄러웠달까. 거리두기가 이렇게 중요했다. 맛집에선 특히.


중요하니까 두 번 얘기한다. <황남 칼국수>를 가게 된다면 칼국수와 함께 부추전과 막걸리를 꼭꼭 드셔 보시길. 칼국수 국물에 한 잔, 부추전에 한 잔, 겉절이에 한 잔, 무 장아찌에 한 잔, 된장에 아삭 고추 찍어서 한 잔, 하다 보면 행복은 적은 돈으로도 살 수 있음에 감사해진다.


ps. <황남 칼국수>의 휴무일은 토요일이다. 토요일에 쉬는 가게가 잘 없어서 당연히 열었겠거니 하고 갔다가 울며 돌아온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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