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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 작가 Jan 21. 2024

여보, 나 집에 안 갈래.

내 이야기를 극영화로 만든다는 것(2)

영신은 남편에게 배려받지 못했던 순간들로 인한 상처가 깊었다. 가령, 임신 중에 먹고 싶은 음식을 말했다가 "너 하나 때문에 국수를 먹으러 갈 순 없잖아. 난 다른 거 먹고 싶어"라고 반응하거나, 영신이만 빼고 시댁 식구와 맛있는 저녁을 먹고 빈손으로 오는 등...그런 일들이 쌓이고 쌓여 서러움이 폭발했던 영신이는 급기야 설거지 중에 접시를 집어던지고 집을 뛰쳐나간 것이다. 호기롭게 나왔으나, 마땅히 갈 데가 없어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가야했다지만.


남편과의 갈등뿐 아니라, 원래 액티비티한 걸 좋아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영신이 육아와 살림에만 '나'를 쏟아야 했을 때 집은 편안한 공간이 아니라, 날아가고 싶은 영신을 가두는 공간이었을 것도 같다.


나는 영신이가 겪었던, 두고두고 사무치는 순간들과 외로웠던 순간들을 흑백으로 담고, 단 하루 달콤한 휴가를 보내는 장면은 컬러로 담아 두 순간들을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극영화를 구성했다. 예시로 몇 장면을 소개하자면,


(과거)

화장대에 앉아 거울을 보는 영신

눈가의 주름, 거친 머리칼, 옷을 들어 뱃살을 만져본다

발을 내려다보면 페디 하나 없는 발톱

모든 게 거슬리고 못마땅하다


(현재)

결혼반지를 뺀 영신

예쁜 원피스를 입고 있다.

톡톡 볼터치로 메이크업을 마무리하고

액세서리를 걸친다

예뻐진 자신을 요리조리 보고

셀카를 찍으려는데


(과거)

초췌한 얼굴, 후줄근한 옷차림의 ‘엄마 영신’이 싱크대 앞에 서 있다

영신 앞에는 라면 그릇

라면 cu하면, 퉁퉁 불어터졌다

‘엄마 영신’과 영신을 쳐다본다      


(현재)

영신, 라면을 끓인다

파 송송 썰고, 고춧가루 팍팍 뿌리고

계란 탁 풀어 휘-저어 완성하는 라면

고급진 인테리어, 예쁜 조명, 널찍한 식탁에

예쁜 원피스를 입고 홀로 앉아 후루룩 후루룩 라면을 맛있게 먹는 영신

그릇째 국물을 들이킨다


현재로 표현된 장면 속 영신은, 내 기억 속의 반짝이는 영신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 극영화는 전문배우가 아닌 교사 친구 영신이가 출연을 하는데다 프로 감독이 아닌 (작가인)내가 연출을 맡았기에 대사는 최소화하고 거의 무성영화처럼 찍었다. 그래서 시나리오에도 대사 없이 지문만 90%다ㅎㅎ 대사까지 하게 되면 연기도 문제지만, 동시녹음이다 더빙이다 뭐다 복잡해진다!! 작가로서 대본만 쓸 때는 무궁무진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찍기 힘든 씬도 막 쓰고, 대사도 넘치게 하는데...에헴! 단편 극영화 <영신> 제작에선 모든 걸 최소화!!! 베프와 함께 한다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비록 초보연출이 진행하는 극이지만, 이 극이 진심으로 친구 영신이에게 위로가 되기 바라는 마음으로 임했다. 영신이의 사연에 바탕해 시나리오를 쓰고, 한 컷 한 컷 어설픈 그림솜씨로 스토리보드 작업을 하고, 조명감독/카메라감독/스크립터/조연출 등 아카데미 동기들로 스태프를 꾸리고, 학원에서 촬영장비를 대여하고, 숙소를 잡아 한 공간에서 종일~새벽까지 촬영을 했다. 후반 음악작업과 색보정과 편집은 내가 할 자신이 없어서 고수들을 고용해 페이를 주고 맡겼다. (초보 연출작에 뉴욕 출신 감독이 작곡한 음악이 입혀지고 15년차 베테랑 피디의 편집이 더해져...)


참고로 <영신> 제작을 함께 도왔던 동기들 일부는 나와 일을 함께 하는 중이고, 한 동기는 다큐멘터리 영화 조감독으로 열일 중이며, 한 동기는 해외영화제에서 극영화로 수상을 해 영화감독으로 정식 데뷔를 했다는 소식이다. 훌륭해 훌륭해. 난? 약은 약사에게. 연출은 연출자에게. 맡기자는 생각이 확고해졌고. 작가의 본분에 더 집중하기로 했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후후.


2020년, 7월 24일~25일. <영신> 촬영!! 대본리딩을 위해 영신이와 조금 일찍 만난 나는, 사진과 사뭇 다른 숙소의 풍경에 실망을 했었다. 그런데, 영신이는 숙소를 보자마자 너무너무 좋아하는 거다. "이야~!! 너무 좋다야!!!이야~" 감탄을 연발하는 소박한 영신에게 "뭐가 좋아우!"했더니, "야야. 아줌마는 나오면 무조건 좋인기라~^^" 얼굴에 '신남'을 새긴 영신이는 한 씬 한 씬 연기를 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더 반짝반짝 빛이 났다.


육아하느라 불어터진 라면을 먹어야 했을 때, 화장실을 제때 못 가 팬티에 소변을 지려야 했을 때, 아이들을 돌보느라 정작 나는 돌보지 못했던 때...영신은 그렇게 엄마 영신으로 아내 영신으로 애써온 날들을 연기하며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모두가 숨죽여 촬영했던 장면은, 같은 침대에서 등돌려 누운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영신이었다. 남편에 대한 일은 특정한 상황으로 그리기보다 이렇게 한 컷의 상징적인 씬으로 여러 의미를 함축했는데, 이때 영신은 아마도 가슴 깊이 박혀있는 아픔을 힘겹게 꺼내면서 눈물이 터졌던건지도...난, 완전히 몰입한 영신의 감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고 한참을 그대로 지켜보다가 진정이 되는 듯 했을 때 컷을 했다. (참고로 남편의 등 역할은 스크립터 스태프가 맡아주었다)


영신을 다치게 한 기억을 하나 둘 털어내며 극은 후반으로 이어지고...현재의 만찬을 즐기며 구멍난 마음을 채워가는 영신이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영신에게! 전화가 마구 울린다. 분명히 외출을 허락해놓고, 아이가 열이 난다는 이유로 SOS를 친 남편의 전화다! 이때, 영신은 습관적인 엄마본능에 이끌려 바로 캐리어를 꾸리고 나가려하지만, 오랜만에 찾았던 '나'의 웃는 모습이 환영처럼 영신을 붙잡고...아내 영신과 엄마 영신과 본연의 영신 사이에 갈등하던 영신은, 결국 집으로 가지 않기로 한다.


"여보, 나 안 갈래"


극 안에서 영신의 정체성을 되찾아가는 여정을 그리려 노력했기에, 내가 아는 영신이라면 할 수 있는 선택을 하게끔 절정의 순간을 만들었다.


그렇게 남편에게 통보하고, 엄마도 아내도 아닌 ’나’로서 마침내 완벽한 자유를 만끽하는 영신! 신나는 음악을 틀고, 와인 잔을 들고 일어나 춤을 춘다. 예쁜 원피스를 입고 맨발로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음악에 몸을 맡긴다. 꽤 어려운 씬이라 어색할까봐 걱정이 되었는데, 놀랍게도 영신이가 춤을 너무 잘 췄다. 이 씬은 스태프들이 모두 자리를 비켜주고, 내가 카메라를 들고 직접 촬영했는데, 영신이의 몸짓을 좇아가며 나도 함께 춤을 추면서 마음껏 찍었다. 이후, 카메라감독이 제대로 다시 촬영을 했지만, 편집감독은 내가 찍은 장면을 픽했다. 조금 흔들리고 서툴러도, 훨씬 더 자연스럽고, 감정이 풍부했고, 무엇보다 주인공에 대한 감독의 애정이 느껴졌다는 이유에서다.


커버 사진이 바로, 영신이의 춤 씬이자 라스트 씬이다.


(분위기를 깨는 얘기긴한데, 실제 상황에서 전화가 왔다면 영신은 바로 달려갔을 거란다. 하긴 극이란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 이루어주는 마술봉같은 것이기도 하다)


영신이는 이날 하루, 극 안에서도 극 밖에서도 진심으로 행복해했다. 나 역시, 극영화를 제작하는 자체의 희열뿐 아니라 오랜 친구 영신이와 함께하는 작업이라 이루말할 수 없이 재밌고 짜릿했다. 촬영이 끝난 시각은 새벽 4시경. 우린 피자와 콜라를 양껏 먹고 기념사진을 찍는 것을 끝으로 마무리했다. 스태프들은 집으로 갔고, 영신이와 나는 해당 숙소에서 숙박을 했다. 아니, 영신이는 잠을 자게 해주었고 나는 장비 정리부터 설거지, 숙소 청소와 분리수거까지 싹 해치웠다.


여담이지만. 이날 촬영장비를 다 실어다주었던 남친은 내가 "혹시 단역 필요할 수 있어. 그때 부르면 와야해. 그게 아니더라도 설거지나 청소할 때 와야해"라고 말해둔 탓에 24시간 대기모드였다. 촬영이 언제 끝날지, 언제 설거지가 필요할지, 언제 배역이 필요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치맥이 먹고 싶은 것도 참고 (운전해야 하니까) 밤을 샜던 모양이다. 나중에 픽업하러 온 남친은 빨간 눈에, 몹시 늙은 몰골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영신이는 그때의 내 남친이 못난이인줄 아는데...사실 잘생겼거든요. (지금은 그 잘생긴 남친과 헤어졌...)


촬영장비를 학원에 반납하고 숙소로 돌아와 영신이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그 길에 국밥으로 아점도 함께 먹고, 아이들 주라고 이것저것 디저트도 챙겨가게 했더니 영신은 답례로 자기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김밥집을 데려가서 김밥을 사주는 것으로 훈훈한 안녕!


(잠을 한숨도 못 잔 남친은 집에 오자마자 기절했고, 나는 김밥을 우걱우걱 먹으며 다음날 다른 촬영(동기의 극영화에 배우 역할로...;;)을 준비하느라 온갖 영양제를 다 먹었..


영신에게 2020년 7월 24일은 어떤 하루로 기억되었을까? 극영화에 '나'를 투영시켜, 슬펐던 영신을 토닥이고, 진짜 영신이를 찾아간 시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영신은 이미 숙소에 등장한 순간부터 내가 아는 '영신'으로 돌아와 있었던 것도 같다.


내내 웃고 있었지만, 내내 우는 것도 같았던. <영신>은 인디스페이스라는 독립영화관에서 상영회를 가졌고, GV도 했었다. 아쉽게도 영신이는 오지 못했지만 여러 여자 관객분들이 내 손을 꼭 잡으며 감동받았다는 평을 해주었다.


연출이 나라서, 엉성했지만 영신이가 배우였어서 누군가의 마음을 터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영신은 본인을 '환자'라고 한다. 어디로 산산이 흩어졌는지 모를 영신이를 이루던 여러 밝고 열정적인 모습들이 다시 영신이를 채우고 채워 충만케 해주었으면 좋겠다. (요즘 교회다니다보니...기도같네요. 아멘)


<영신>의 주인공은 바로 영신이니까!


에필로그/

영신이에게 컨펌을 받고 이 글을 쓰는 동안, 그때 우리가 촬영장에서 나누었던 웃음소리가 배경에 깔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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