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의 시선에서는 모두가 동등하다.
최근 필자가 관람했던 영화들에 불편함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최대한 작품성이 뛰어나다고 정평이 난 그런 영화들을 찾아보곤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 이누도 잇신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조나단 글레이저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 켈시 만의 <인사이드 아웃 2>, 그리고 최근 재개봉으로 보고 왔던 압둘라티프 케시시의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모두 나에게는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함을 안겨주었다.
<괴물>,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동성애가 함유되어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을 주제로 하기 때문에 불편함을 느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는 유대인을 더 효율적으로 학살하기 위해 고민하는 사령관의 모습에 불편했다. 그리고 <인사이드 아웃 2>는 픽사가 디즈니에 인수되어 그 영향으로 주인공의 친구들을 유색인종으로 넣은 점이 불편했다. 디즈니는 PC(정치적 올바름)의 일환으로 흑인 배우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하는 행보를 보이는데 실사화된 <인어공주>를 보면 쉽게 와닿을 것이다.
필자가 느끼는 불편함은 혐오감으로부터 오는 피하고 싶은 불편함은 아니다. 지금까지 편협한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내가 진리라고 생각하던 것들과의 괴리로부터 오는 정신적 불편함이다. 쉽게 말하면 영화를 보고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교에서는 소외계층 및 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을 지양하도록 배워왔다. 차별금지 표어 만들기, 포스터 만들기, 글짓기, 등 경연대회를 개최하지만 매번 외부에서 부르는 강연자들 중 장애인과 퀴어는 없었다. 차별 가득한 현실에서 모순으로 가득한 차별을 배우면서 매번 상상으로만 차별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함께 어울려서 친해지기만 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직적 관계의 사회생활을 직접 경험해 볼 수 없었기에 지시불이행이 얼마나 큰 하극상인지도 알 기회 없었다.
카메라의 차별 없는 시선에 필자의 세상은 붕괴되어 간다. 카메라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 남자아이와 남자아이의 우정, 양성애자와 동성애자 간의 사랑 모두 카메라를 통해서는 동등하게 보인다. 아우슈비츠의 소각장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해 구조를 설계하는 나치 사령관의 모습은 회사에서 상사의 지시를 착실히 이행하는 직장인의 모습과 동등하다. 미국은 다인종국가이기 때문에 교실에 아시아계 미국인,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있는 것도 우리나라 학교에 다문화가정의 학생이 있는 것과 동등하다.
필자의 일상에 대한 생각과 그들의 일상은 다를 것이라는 편협된 생각이 카메라에는 고스란히 가시화된다. 생각이 아직도 어리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이 부끄러움이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필자가 살아온 세상은 모더니즘에 빠져 구조적으로 쌓아 올려진 아파트와 같다. 이것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 이제는 구조를 해체하는 도구가 필요하다. 불편한 영화들이 바로 그 도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