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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호 Sep 23. 2024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고

독후감


  하루키의 신작이 나왔다길래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주문했다. 주문한 책은 다음날 바로 집에 도착했다. 기대와 설렘을 안고 책을 펼쳤다.


  ‘현실’과 ‘비현실’은 맞닿아있다. 현실을 말하면 구체적이라 하고, 비현실을 말하면 추상적이라 말한다. 이번에 나온 하루키의 신작 소설「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는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 독자 입장에서 작가의 의도를 정확히 짚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전체 3부 가운데서 특히 1부는 모호한 설정 때문에 생경하기도 하고 다소 지루한 느낌마저 들었다. 2부에는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등장해서 지루함을 떨쳐버릴 수 있었고, 3부에 들어서 비로소 작가의 의도가 읽혀졌다. 하지만 워낙에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소재와 상황들이 많아서, 경우에 따라서는 독자마다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소설에서는 단 두 명을 제외하고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없다. 도서관장 ‘고야스’와 1층 사서 ‘소에다’에게만 이름을 붙여놓았다. 1인칭 관찰자(주인공) 시점이기 때문에 주인공은 ‘나’로, 상대 여주인공은 ‘너’로 명명했다.


  나는 열일곱 살, 너는 나보다 한 살 아래다. 나는 너로부터 ‘사방이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관해 듣는다.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선 본인의 그림자를 버려야 하고 눈에 상처를 내야 한단다. 내가 보고 있는 너는 진짜가 아니라 대역(그림자)이라고 네가 말한다. 그리고 ‘진짜 너’는 도시 안에 있는 도서관에서 일한다. 그 도시엔 중앙 광장에 높은 시계탑이 있지만 시곗바늘은 달려있지 않다. 내가 그 도시에 들어갈 수 있고, 도서관에서 ‘오래된 꿈’을 읽을 수 있을 거라고 너는 내게 말한다. 도서관에 책이라고는 한 권도 없고 ‘오래된 꿈’만 가득한데 내가 그곳에 가면 ‘꿈 읽는 이’가 될 거라고도 말한다.


  ‘실제’ 세계에서 나는 바다 근처 조용한 교외 주택가에 살고, 너는 훨씬 크고 번화한 도시 중심부에 살고 있다. 나는 이 지역 공립 고등학교에, 너는 네가 사는 도시의 사립 여자고등학교에 다닌다. 나와 네가 처음 만난 곳은 ‘고등학생 에세이 대회’ 시상식장이었다. 난 고등학교 2학년, 넌 1학년. 난 너에게 대담한 제안을 한다. 나에게 편지를 보내줄 수 있겠냐고. 일주일 후, 너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그렇게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제를 시작한다.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선 해가 저물녘 뿔피리 소리가 울려퍼진다. 길게 한 번, 짧게 세 번. 금작화 이파리를 씹고 있던 외뿔 달린 짐승(단각수)들은 마치 주문이 풀린 듯 한 곳으로 몰려간다. 벽에는 문이 하나뿐인데 문지기는 뿔피리를 불어 짐승들을 불러모아 벽 바깥으로 내보낸다.


  도시 안의 도서관은 석조 건물이다. 내가 무거운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자 사방 5미터 정도인 정사각형 방이 보인다. 창은 하나도 없고 회벽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사람도 보이지 않고 매끈하게 텅 빈 벽만 보인다. 나무 행거가 있고 고풍스러운 난로에선 장작이 타오르고 그 위에 놓인 주전자가 김을 피운다. 십오 분쯤 지나서 네가 들어오고, 나는 ‘꿈 읽는 이’의 일을 시작하기로 한다. 너는 열 여섯 살 그대로이지만 나는 이제 훨씬 나이 많은 어른 남자다. 나는 도서관에서 일을 마치고 퇴근하며 너와 함께 걷는다. 나는 멀리 동쪽에 있는 도시에 왔고 그곳 사람들은 누구나 그림자를 데리고 산다고 말한다. 네가 사는 ‘직공 지구’는 옛 다리 북동쪽에 있는 쇠락한 지역이다. 나는 너를 바래다주고 ‘관사 지구’에 있는 작은 집으로 퇴근한다.


  ‘실제’ 세계에서 열 일곱의 나는 5월의 일요일 아침에 너를 만나러 간다. 지하철 역 근처 작은 공원에서 만난다. 너는 그때까지 한 번도 약속 시간에 늦은 적이 없었고, 내가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 일찍 나가도 너는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네가 어느 날 약속 시간보다 사십 분 늦게 나타났다. 그런데 말은 하지 않은 채 숨소리가 거칠고 숨쉴 때마다 가슴이 오르내린다. 무슨 일이 있었음을 눈치채지만 너는 대답 없이 앉아 있다가 이윽고 아무 말 없이 일어나 걷는다. 나는 너를 따라 계속 걷지만 삼십 분 후에는 출발했던 자리로 돌아온다. 너는 오열하며 울고 나는 어깨를 내준다.

  며칠 후 다시 만난 너는 나를 좋아한다 말하고, 나도 역시 사랑을 고백한다. 그리고 너는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듯 말한다. “가끔 내가 무언가의, 누군가의 그림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여기 있는 나한테는 실체가 없고, 내 실체는 다른 어딘가에 있어.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언뜻 나처럼 보여도 실은 바닥이나 벽에 비친 그림자일 뿐……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어.” 그리고는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대해 말해준다. 그러나, 그 이후 너는 더 이상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벽 안 도시에서 나는 도서관에 있을 때 말고는 도시의 지도를 만들며 시간을 보낸다. 지도를 만들기 위해 도시의 이곳저곳을 다닌다. 이 땅은 오랜 세월 버려진 채 방치된 듯했다. 사람도 보이지 않고 간혹 집 같은 건물도 보이지만 폐가나 다름없는 상태다. 지도를 그려나가며 벽을 탐색하는 일은 약 이 주일만에 끝나버린다. 고열이 나며 열병을 앓는다. 이웃에 사는 한 노인이 찾아와 살뜰하게 간호해준다. 노인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해준다. 이 도시로 오기 전에 그는 군인이었는데 전쟁이 일어났다. 유탄 파편을 맞아 후방으로 이송되어 산속 작은 온천마을의 여관에 머물며 치료를 받았다. 여관 방에서 유리문 달린 베란다에 있을 때 어느 젊은 여자의 망령을 봤다.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을만큼 아름다운 그녀는 매일 밤 나타났는데 옆 얼굴밖에 볼 수 없었다. 이윽고 군인은 상처 치료가 끝나고 귀향했는데도 여전히 그 여자 생각이 나서 다시 그곳을 찾아갔다. 반대편 얼굴이 너무 궁금해서 그 얼굴을 들여다봤는데, 결코 사람이 봐서는 안 되는 세계의 광경을 봤다고 말한다.


  나는 열이 내린 후, 오랜만에 도서관에서 일하고 퇴근한다. 노인이 찾아와 대화한다. 짐승들은 겨울에 추위와 배고픔으로 몇 마리씩 죽어나가고, 문지기는 동물 사체를 구덩이에 던져넣고 태운다고 한다. 아침부터 내리던 눈이 멎고 살짝 흐린 오후, 나는 오랜만에 문지기의 오두막을 찾아간다. 나는 도시에 들어올 때 벗어놓은 그림자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문지기에게 말한다. 그림자 쉼터에서 지내던 그림자가 나를 알아보고는 대화를 시작한다. 본체에서 억지로 벗겨져나간 그림자는 오래 살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나는 남쪽 벽 바로 앞에 있다는 ‘웅덩이’에 대해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고서 너와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웅덩이는 위험해서 되도록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다고 했지만 나와 함께 가기로 한다. 웅덩이 바닥에 입을 벌린 동굴이 있어서 물에 빠진 사람은 그곳으로 빨려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웅덩이 너머에는 바깥세계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뛰어드는 상상까지 한다.


  나는 문지기 오두막에 다시 찾아가 나의 그림자를 만난다. 그림자는 나와 합쳐야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이 도시에서 함께 탈출하자고 제안한다. 웅덩이를 통해 벽 밑을 빠져나가면 곧바로 바깥공기를 마실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보기엔 저쪽이야말로 진짜 세계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고생하며 나이들고 쇠약해져 죽어가요. 물론 썩 재미있는 일은 아니죠. 하지만 세상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닌가요. 그 과정을 이어가는 게 순리입니다.”

  나와 그림자는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함께 웅덩이를 향해 떠난다. 이 사실을 문지기가 알게 되면 뒤쫓아올 것이 뻔하므로 문지기의 뿔피리를 훔쳐 달아난다. 둘은 함께 도망하며 뿔피리를 불어 짐승들이 문을 향해 몰려들게 해서 도망갈 시간을 번다. 둘은 마침내 웅덩이 앞에 다다랐지만 나는 도시에 그대로 남기로 하고 그림자만 떠나보낸다.


  ‘실제’ 세계에서 나는 대학에 들어가 연인도 생기지만 너만을 위한 마음의 공간을 어딘가에 보존해둬야 하기에 연애는 번번이 실패한다. 시간이 흘러 오년이 걸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출판유통사에 취직한다. 회사에서는 직급도 올라가고 수입도 부족하지 않지만 삼십대가 끝나고 마흔이 되어도 다른 여자는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직장을 그만둔다. 일을 그만둔 지 두 달 남짓 지났을 무렵, 꿈을 꾸는데 내가 도서관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내 책상 한구석에 베레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꿈에서 깨자 내가 사는 도쿄에서 머리 떨어진 도서관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지인으로부터 후쿠시마현의 마을 도서관을 소개받고 면접 시험을 보러 간다. 1층 카운터에서 만난 직원 ‘소에다’씨는 면접시험이 예정되어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나를 2층 도서관장실로 안내한다. ‘고야스’ 관장이 반갑게 나를 맞이한다. 꿈에 보았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 베레모를 그의 책상 구석에서 발견한다. 그 자리에서 합격한 나는 십 년 넘게 혼자 살았던 임대맨션을 정리하고 Z**마을의 새 집으로 이사한다.

  고야스 씨는 베레모를 쓰고 시계바늘 없는 시계를 차고 스커트를 입고 다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 않는다. 그는 인수인계를 해주고도 며칠에 한 번꼴로 찾아와 업무와 관련한 조언을 해준다. 어느 날은 찾아와서, 겨울을 나기에는 관장실보다 더 따뜻한 방이 있다며 잘 알려지지 않은 반지하 방으로 안내한다. 그곳은 가로 세로 4미터쯤 되는 정사각형 방이다. 바닥은 나무고, 카펫은 깔려있지 않다. 오래된 나무 책상 하나와 두 개의 의자가 놓여있다. 새까맣고 고풍스러운 장작 난로도 있다. 오래된 사과나무 장작을 태우면 무척 좋은 사과 향이 난다.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서는 열 여섯 살 소녀가 항상 나를 위해 미리 난롯불을 피워주었고 난로 위 주전자에서 김이 났다는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열시가 넘어서 고야스 씨로부터 전화가 온다. 도서관의 반지하방으로 와서 대화를 나누자고 한다. 방에 도착해보니 그가 먼저 와서 빨갛게 타오르는 난로 앞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얘길 들어보니 고야스 씨는 이미 죽은 사람이며 가끔 육체의 모습을 가지고 방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도 그림자가 없으며, 내가 과거에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실도 알고 있다.

  이튿날, 나는 소에다 씨를 관장실로 불러 고야스 씨에 대해 묻는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소에다 씨와 나에게만 고야스 씨의 모습이 보인다고 한다. 도서관 건물은 원래 고야스 씨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양조장이었는데 나중에 도서관으로 개조했다고 한다. 고야스 씨는 첫 아들을 잃고 아내는 그 충격으로 자살했고 그 이후 줄곧 혼자 살았다고 한다. 그는 일흔 다섯 살 때까지 건강하게 살았지만 산책 도중 심장 발작으로 1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존경하는 분이었기에 그를 아는 모두는 상실감이 컸고, 소에다 씨 역시 관장의 일을 도맡아 해서 힘들었다고 한다. 한동안 꽤 오랫동안 고야스 씨의 유령은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그의 묘지에 가서 명복을 빈다.

  평소 열람실에서 자주 목격했던 열일곱 살 정도의 아이가 말을 걸어온다. 그는 초록색 요트 파카에 옅은 톤의 청바지를 입고 검은색 농구화를 신고 있다. 요트 파카 앞면에는 비틀스의 <옐로 서브마린>인 노란 잠수함이 프린트되어 있다. 그가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생년월일을 묻는다. 알려주자 그날은 ‘수요일’이라고 말한다. 알고 보니 아이는 서번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천재 소년이었다.

  도서관 휴관일인 월요일 아침에 나는 고야스 씨의 묘소에 찾아간다. 아무도 들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대해 떠오르는대로 이야기한다. 가까운 곳에서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정식 학교에 다니지 않는 소년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도서관에 나와 도서관에 있는 책을 읽어낸다. 놀랄만큼 많은 분야의 많은 책들을 흡수한다.

  꽤 오랫동안 고야스 씨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는데, 어느 날 소에다 씨가 찾아와서는 소년이 관장님께 전해달라고 부탁받은 물건을 전달한다. 봉투를 열어보니 A4용지에 그려진 지도다. 묘지 앞에서 그냥 대충 얘기했던 ‘벽에 둘러싸인 도시’의 모습이 거의 정확히 그려져 있었다. 대단히 놀랐지만 지도에서 틀리게 그려진 부분에 표시를 하고는 소에다 씨에 건네주고, 소년을 만나면 전달해달라고 부탁한다.

  역 근처 작은 커피숍에 들러 블랙커피와 머핀을 먹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곳에 소년이 나타난다. 소년은 커피숍 주인에게 다가가 생년월일을 묻고, 그날이 수요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내게 봉투를 건네주고 사라진다. 봉투를 열어보니 틀린 부분을 고쳐서 그린 새 지도가 들어있다.

  다음날 아침 소년이 관장실에 찾아와 대화를 나눈다. 대화라기 보다 단순한 의사 소통 정도다. 평소에도 말이 없는 아이는 수첩에 글씨를 적어 관장에게 보여준다. 나는 소년에게 벽에 대해 설명해주고, 소년은 벽에 대해 많은 것을 아는 양 대답한다. 벽은 역병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자신은 그 도시에 꼭 가야하고, 그곳에서 오래된 꿈을 읽을 거라고 말한다.

  나는 고야스 씨 묘지에 갔다가 역전 커피숍에 들러 소년에 대해 커피숍 여주인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주인에게 식사를 한 번 하자는 제안을 하고, 그 다음에 커피숍에 갔을 때는 그녀를 집으로 초대해 요리를 해주겠다고 제안한다. 집에 가서 둘은 요리를 해먹으며 친해진다. 그녀를 바래다주고 자연스럽게 발길이 도서관으로 향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반지하방에 갔더니 고야스 씨가 불을 펴놓고 기다리고 있다. 옐로 서브마린 소년에 대해서도 함께 의견을 나눈다.

  소년이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자 소년의 집에서는 그를 찾아 나선다. 아버지는 도서관에 찾아와 관장인 나와 면담을 하고 돌아간다. 소년의 형들도 사라진 동생을 찾기 위해 커피숍 주인에게 찾아가 몇 가지를 묻는다. 큰형은 변호사, 작은형은 의대생이다. 이들도 역시 나를 찾아와 동생에 대해 묻는다. 나는 소년에게 이야기했던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대해서도 형들에게 간략히 말해준다.


  마흔 살이 넘은 나는 이제 벽에 둘러싸인 도시 안에 있다. 꿈을 읽으러 도서관으로 향하는데, 다리 맞은 편에 서 있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눈에 들어온다. 다음날도 소년을 발견했지만 그 다음날은 보이지 않는다.

  깊이 잠들지 못한 밤에 흠칫 잠에서 깼을 때 누군가 옆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마치 가위눌린 것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는데, 그가 말한다. “당신이 태어난 날은 수요일입니다.” 알고 보니 그가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다. 그도 벽을 통과해 도시에 왔다고 하며, 자신은 그림자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나와 하나가 되면 그와 내가 함께 오래된 꿈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소년이 원래 나고, 내가 원래 소년이란다. 이윽고 나는 깊은 잠에 빠진다. 그날 이후로 내가 꿈을 읽는 속도는 월등히 빨라진다. 소년과 나는 일체화되었다.


  내가 소년을 남긴 채 이 도시를 떠날 거라고 소년은 말한다. 그리고 벽 바깥에 있는 내 그림자와 내가 하나될 거라고도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습니다. 그림자와 본체는 아마 서로 교체되기도 할 겁니다. 역할을 교환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본체가 됐건 그림자가 됐건, 당신은 당신입니다. 그 사실은 틀림이 없어요. 어느 쪽이 본체고 어느 쪽이 그림자인가를 따지기보다, 각자 서로의 소중한 분신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오히려 맞을지도 몰라요.”


  작가가 이 소설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독자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게 받아들여지리라 생각한다. 모호한 개념을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다소 명확하게 개념이 잡히지 않을 때도 있고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가지는 매력이라고 한다면, 단점인 것 같은 모호함이 오히려 해석의 다양성을 유도하는 요소가 된 듯하다는 점이다. 장황하고 추상적인 서술이 오히려 독자의 상상력을 최대한 끌어들이는 요소가 된다는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다. 평가야 분분하겠으나, 대가의 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얻었다는 점에서는 나름대로 소득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작가의 후속작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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