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을 소재로 다루는 이야기들은 이제껏 많이 접해왔다. 이런 류의 이야기를 여러 번 접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신선할 수 있겠으나, <백 투더 퓨처(Back to the future)>와 같은 영화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내게는 이런 이야기에서 식상한 느낌마저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더군다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까지도 낯설게 받아들이지 않는 나로서는 더더욱 ‘시간 여행’이 진부한 소재일 수 있었다. 하지만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겨갈수록 이야기가 독자를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게 되었다. ‘기욤 뮈소’가 쓴 이 작품은 한국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역시 책을 통해 상상한 이미지와 영화가 주는 이미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되었다.
이야기는 캄보디아에서의 봉사활동으로부터 시작된다. 주인공 엘리엇은 60세의 미국인 소아 외과의사다. 캄보디아 현지에서 한 어린 아이의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그 마을의 촌장인 노인이 엘리엇에게 보답하고자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한다. 엘리엇은 꼭 한 번 만나고 싶은 여인이 있다고 말하자, 노인은 황금색 알약 열 개가 든 병을 건네준다. 여기서 알약이 열 개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소설의 말미에 반전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60세의 엘리엇은 30년 전에 죽은 애인 일리나가 보고 싶었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할 수만 있다면 30년 전으로 돌아가 살아있는 일리나를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30세의 엘리엇은 샌프란시스코(서부)에, 그리고 그의 애인 일리나는 플로리다(동남부)에 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4천 킬로미터라는 공간적 장벽이 막고 있지만 둘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일리나는 엘리엇의 아이를 갖고 싶어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당했던 폭행과 어머니의 자살, 불행했던 가정사로 인해 일리나와의 결혼을 망설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60세의 엘리엇이 황금 알약을 먹고 30년 전으로 돌아간 건, 자신의 30년 전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기 보다 일리나를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첫 알약을 먹었을 때 30세의 자신과 마주친 엘리엇은 본인도 놀랐지만 30세의 그도 대단히 놀랐다. 둘의 만남은 놀람으로 끝났지만 두 번째 만남에서는 60세의 엘리엇이 라이터를 놓고 돌아가는 바람에, 그가 과연 자신과 같은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 라이터에 찍힌 지문 조회를 의뢰해본다. 지문이 본인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그의 방문을 은근히 기다리기 까지 했다.
일리나는 플로리다 올랜도에 위치한 오션월드에서 수의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평소에는 고분고분하던 범고래 한 마리가 수족관에 갇혀 지내는 스트레스로 인해 자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일리나가 물에 뛰어들어 진정시켜보려 했지만 범고래는 그녀를 물속 깊이 끌어당겨 익사시키고 만다. 이 사건을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리나가 엘리엇에게 찾아가겠다고 전화했을 때 오케이만 해줬더라면 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전화를 끊고 나서 일리나가 범고래에게 달려갔기 때문이다.
60세의 엘리엇은 과거로 돌아가 이 사건을 바꾸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아 시한부 인생을 사는 처지였다. 알약을 먹고 30년 전으로 돌아가 젊은 자신과 대화했다. 일리나가 곧 죽을 것이고, 그녀를 살리고 싶다면 세 가지 약속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첫째, 둘이 추진하려고 하는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 둘째는 일리나와 헤어질 것, 셋째는 앞으로 9년 뒤 밀라노에서 열리는 학회에 여성 심장병 전문의와 만나게 될 텐데 그녀와 함께 주말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세 번째 조건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때 만나는 여성이 바로 자신의 딸(앤지)을 낳아줄 사람이라는 것이다. 만일 일리나와 헤어지지 않는다면, 미래에 자신의 딸(앤지)이 태어나지 못할 것이기에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일리나와 앤지를 모두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젊은 엘리엇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하고는 일리나에게 모질게 이별을 통보한다. 그런데 일은 예상했던대로 움직이지 않고 또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별 통보를 받은 일리나는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교각 위로 올라가 투신한다.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오고, 그 사실을 알게 된 30세와 60세의 엘리엇이 일리나를 살리기 위해 공동으로 수술을 진행한다.
세월은 흘러흘러 60세가 된 엘리엇은 이후 폐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다이어리를 딸 앤지에게 주고 떠났다. 장례식에 마지막까지 남아있을 사람이 자신의 절친이었던 매트일 것이니 그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앤지로부터 건네받은 다이어리를 읽은 매트는 이 사실을 나이 든 일리나에게 알렸고, 그녀는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에 매트는 이미 죽은 엘리엇을 다시 살려 데려오겠노라고 일리나에게 악속한다. 매트는 엘리엇이 황금 알약 9개만을 먹고 떠났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그의 집에 찾아가 나머지 한 개의 알약을 찾아낸다. 매트가 이 약을 먹고 30년 전의 엘리엇에게 찾아간다. 그는 엘리엇에게 담배를 끊으라고 신신당부하고 돌아온다. 젊었을 때부터 담배를 입에 달고 살았던 엘리엇에게 강력한 경고를 날렸더니 그는 그 순간부터 담배를 끊었고, 그 후 30년이 흐를 때까지 폐암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다. 이후에 엘리엇과 일리나가 만났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아마 둘은 행복한 노년을 맞이했을 거라 추측해본다.
이 소설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엘리엇은 사랑하는 일리나가 불의의 사고로 죽지 않기를 바랐을 것인데, 과거의 비뚤어진 사건을 뒤바꾸기 위해 인위적인 조작을 가했지만 결국 사건이 원하는대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것도 우리가 주목해봐야 할 일이다. ‘수족관에서의 비극적인 죽음’을 막았지만 ‘자살 시도’라는 또다른 비극이 찾아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흔히 “과거로 돌아간다면 더 나은 다른 결정을 할텐데...” 라고들 말한다. 그것은 물론 불가능한 일이지만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 해도 그 ‘다른 결정’이라는 것이 반드시 선(善)으로 돌아온다는 보장을 받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전화위복(轉禍爲福)’과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새삼 와닿는다. 과거의 ‘화(禍)’가 현재의 ‘복(福)’이 될 수도 있고, 과거의 ‘복(福)’이 현재의 ‘화(禍)’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현재 어떻게 처신해야 옳은가 하는 기준을 정할 수 있다고 본다. 그저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사르트르가 말한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이다.” 라는 명언은 순간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시사해주는 말이다. 모 가전회사의 광고 카피도 인상적인 여운을 남긴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여러모로, 기욤 뮈소의 소설은 인생에서의 선택과 그 선택이 낳는 결과와의 상관관계를 생각해보라는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던져준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