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를 기억하시나요...?
'어린왕자' 책을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씩 꺼내서 다시금 읽곤 합니다.
어릴 때 처음으로 '어린왕자' 책을 읽고서는 책에 나온 한심한 어른이 되기 싫었습니다. 나중에 커서도 괜찮은 어른이 되기 위해,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왕자'를 계속 읽어야겠다고 다짐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 제가 그 한심한 어른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들이 친구들의 이야기를 신나게 하고 있는데 제가 이런 질문을 하더라고요.
"그 친구는 수학 점수가 몇 점이니?"
아이가 친구와 같이 논 이야기를 하고, 그 친구의 재미있는 점을 암만 이야기해도 어떤 아이인지 다가오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제 바보 같은 질문의 답을 들은 후에야, 그 친구가 어떤 아이인지 그제야 파악이 되었습니다. '아. 수학 95점 맞은 친구는 이런 아이구나.' '영어 점수가 60점인 친구는 이런 아이구나.' 시험 점수를 통해서야만 아이의 친구들을 판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끔 아이들이 친구네 집에 놀러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도 여지없이 한심한 어른의 질문이 나옵니다.
"그 친구네 집은 몇 평이니?"
"집에 방이 몇 개가 있니?"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말은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친구네 집에는 어떤 장난감이 있고, 어떤 게임기가 있는지는 친구네 집이 어떠한지 전혀 파악이 안 됩니다. 딸아이가 신나서 이야기했던 친구네 집에 있는 햄스터와 고양이는 저에게 집을 이해하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귓등으로 들은 후에, 그 집이 우리 집 보다 넓은지 좁은 지를 질문하고 답을 들은 후에야 이해했습니다. '아, 친구네 집은 이런 집이었구나.'라고 말입니다.
'어린왕자' 안에 있는 글귀입니다.
어른들은 숫자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면 정작 중요한 것은 묻지 않는다.
"그 친구의 목소리는 어때? 그 친구는 무슨 놀이를 좋아하니? 나비를 채집하는 걸 좋아하니?"
이런 질문은 하지 않는다.
"그 친구는 몇 살이니? 형제는 몇 명이야? 몸무게는 얼마나 나가니? 아버지 수입이 얼마나 되니?"
이렇게 질문하고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 그 집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창가에는 예쁘게 핀 제라늄 화분이 놓였고, 지붕 위로 비둘기가 날아드는 멋진 장밋빛 벽돌집을 봤어요."
차라리 이렇게 말하면 쉽게 떠올린다.
"시세 100만 프랑짜리 집을 봤어요."
그래야 비로소 어른들은 탄성을 지른다.
"정말 멋지겠구나."
- 어린왕자 p27 중에서 -
'어린왕자'에 나오는 코끼리를 먹은 보아뱀의 그림을 기억하시나요? 저는 10살 때 처음 봤던 그 그림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합니다. 어린 눈으로 보아도 보아뱀이 아닌 모자 그림으로 보여 겁이 났던 순간이었거든요. 나는 아직 어린이인데도 코끼리를 먹은 보아뱀이 아닌 모자로 보이니, 나는 타락한 어린이인가 하는 걱정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래도 그다음에 나오는 글들은 어린 왕자와 같은 생각이었고, 숫자를 좋아하는 어른의 이야기를 읽을 때도 어른의 질문이 바보 같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마흔이 넘은 지금의 저는 숫자가 아닌 아이의 말들이 터무니없는 말로 느껴집니다. 친구의 목소리, 무슨 놀이를 좋아하는지, 나비 채집을 좋아하는지는 전혀 쓸데없는 내용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친구의 나이, 형제가 몇 명인지, 시험 점수는 어떻게 되는지가 제일 중요하게 느껴지고요.
'어린왕자'를 가끔씩 읽어서 한심한 어른이 되지 않겠다는 결심이 우습게 돼버린 것 같기도 합니다. 이제는 '어린왕자'를 읽어도 예전에 이상하게 느껴지고 경계하고 싶은 내용들이 오히려 맞게 느껴지기까지도 하니까요. 저는 정말 사회의 어른이 되었나 봅니다. 한심하긴 해도요. 어린아이들과 공감할 수 있는 멋진 어른이 되고 싶었지만, 저는 그냥 그런 어른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이 친구의 시험점수가 학생 됨됨이의 중요한 척도라고 믿고 있으니까요. 한심한 어른이 되어가는 제 모습이 씁쓸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