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안쪽_25. 윤동주의 "서시"
「서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하략)
(윤동주, 「서 시」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
시인 윤동주는 우리 국민 대부분이 알고 있는 애국시인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만주에서 태어나 서울(경성) 연희전문을 거쳐 일본 유학을 한 엘리트 청년이었으나, 독립운동에 가담한 죄로 형무소에 죄인 아닌 죄인으로 갇혀 살다가 나라의 해방을 불과 얼마 앞두고 세상을 떠난 안타까운 분이다. 나이 겨우 28세이니 꽃다운 나이에 당신의 뜻을 펼치지도 못했으며, 나라의 치욕에 대해 가슴 아파하다가 요절한, 쉽사리 잊을 수 없는 이 땅의 고귀한 인물이다.
이런 분들은 언제나 스스로를 돌아보면서도, 나라의 운명이나 세상의 일에 대해 자신과의 관련성을 굳이 외면하려 하지 않는다. 나라를 외세에 빼앗긴 것에 대해서, 이런 나라를 위해 자신이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 것에 대해서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괴로워한다. 누구는 나라를 자신의 이익과 안위를 위해 활용하거나 나라를 팔아넘기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는데, 윤동주 시인은 나라가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는 치욕을 견디지 못하며 괴로워할 뿐만 아니라, 이를 극복하거나 회복하려 스스로 결의엔 찬 다짐을 한다.
「서시(序詩)」는 바로 윤동주 시인의 이런 마음의 소리를 그대로 전달해 주는 착하고 맑은 시이다. “죽음”이라는 개념과 이미지가 2회에 걸쳐 드러나는 것은 윤동주의 결기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지만, 그럼에도 하늘과 바람과 별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은 윤동주의 순결하고 선한 감성이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을 매우 고매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수많은 사람들이 평가하는 이유가 더욱 명확해진다. 비록 살아있는 생명체, 이 땅의 창조물을 “죽어가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나마 그의 비장함과 고뇌를 담는 방식이라 할 수 있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자신의 아픔, 비애를 은유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어차피 생명은 유한하고 영원할 수 없으며 언젠가는 생명을 다 하고 죽게 되어 있다. 따라서 자연스런 표현이라 할 수 있지만, 윤동주는 이렇게 조금은 자신의 불행하고 우울한 마음을 담아내려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윤동주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을 지속하려 한다. 그에게 비애는 비애일 뿐 절망과 좌절은 없다. 자신이 죽는 날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을 다 하리라는 다짐을, 하늘에 대하여 우주에 대하여 하고 있다. 하늘이 지켜보기에, 존엄하고 외경(畏敬)스런 하늘에 대고 한 점의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며, 잎 새를 스치는 작은 동요에 의해서라도 자신은 흔들리지 않겠노라는 다짐을 한다. 조금이라도 약해지거나 흔들림이 있다면 스스로 괴로워할 정도로 윤동주는 확고한 다짐을 하면서, 우주의 별을 향해 맹세를 한다.
우리에게는 예부터 우주 사상이 있었다. 하늘과 별은 절대적인 대상이며, 나아가 창조주와도 같은 상징이다. 또한 바람은 이에 대해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는 숨결이라 할 수 있는데(장자는 바람을 대지의 숨결이라 하였다), 윤동주는 자연과 우주에 대한 깊은 성찰과 인식을 가진 고결한 지식인임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신(新) 서양학문을 배우는 대개의 지식인을 넘어 깊은 사색과 성찰이 있는 철학자적 깊이가 있는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생명의 유한함과 함께 우주의 근원에 대한 깊은 믿음으로 해서 명확한 생명철학이 정돈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마지막 싯귀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에서, “별”은 우주의 근원으로서 자신을 지켜주는 상징이며, 또한 자신의 생명은 우주의 뜻에 좌우 되는 것이라는 사상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은 생명의 기운인 “바람”이 자신에게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보다 강건하게 자신의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윤동주의「서시(序詩)」는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대표 시 중의 하나이다. 젊은 지식인의 감성과 비애를 담아서, 즉 나라를 떠나 기약 없는 미래를 도모하면서 공부를 해야 하는 처지에서 답답함을 느낄 만큼 열정도 갖추어, 자신의 강한 의지를 표현하면서도, 차분하고 절제된 감성으로 자신을 다독이고 있다. 감성의 이미지가 주된 시적 요소를 차지하면서도 감정에만 치우치지 않으며 메시지를 담아내는 시인의 성숙성이 전체적으로 잘 감싸고 있는 대표적 수작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겪는 크고 작은 수많은 고뇌꺼리들은 나라를 빼앗기는 것만큼 크지는 않을 지라도 수시로 마음으로부터 발현하게 되어 있다. 그 속에서 인간들은 갈등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다짐을 한다. 우리는 잘 살아가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왜 살아가는 지를 생각하고 성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때 마다 이 시는 늘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가늠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에게 빗대거나 정곡으로 대보거나 한다면 윤동주 시인이 스스로에 대해 했던 그 순수하고 결의에 찬 마음의 정리는 어느 때라도 나에게, 많은 사람에게 세게 울려주는 단단한 종소리가 되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