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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별 Feb 19. 2022

그해 여름, 올림픽

옥탑방에 찾아온 KBS 수금원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1Q84'의 여자 주인공은 '아오마메'다. 그녀의 어릴 적 트라우마는 증인회 신자인 엄마의 손에 이끌려 포교를 위해 일요일마다 남의 집 벨을 누른 일이다. 남자 주인공 '덴고'의 트라우마도 비슷하다. 그는 NHK 수신료 수금원이었던 아빠를 따라 일요일마다 남의 집 문을 두드렸다. 그것이 그의 트라우마다. 책에 묘사된 수금과 포교의 공통점은 집요함이다. 집요함은 반복적이고 계획적이다. KBS도 수신료를 오래전부터 받아왔다. 지금은 전기요금에 합산해서 징수되지만 과거에는 수금원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수금을 했다. 어릴 적 기억으로 KBS라고 쓰인 완장을 찬 아저씨가 어깨에 작은 가방을 메고 나타나 돈을 받고 영수증을 끊어줬다. 그때는 집안 형편이 괜찮아서 수신료도 무난히 냈고(큰 실랑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무더운 여름에는 냉수도 한 잔 대접하는 여유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난데없는 어려움에 직면한 우리 가족은 외가 쪽 친척집 옥탑방에서 몇 개월을 살게 되었다. 지금은 사라진 건물로 사진은 아파트로 개발되기 전의 모습이다. 왼쪽 옥상 위에 옥탑방이 보인다. 냉수를 얻어 마셨던 KBS수금원은 어느 날 저 옥탑방을 찾아왔다. 그날 그 수금원이 어떤 말들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결국 영수증을 발급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어머니는 뭐랄까, 매우 자존심이 상한 분위기였다. 그때 열세 살이었던 나는 앞으로 어머니가 내야 하는 세상의 어떤 요금도 내가 대신 내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수금은 집요했다.


내일이면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끝난다. TV에서 중계하는 몇몇 경기를 봤다. 예리한 스케이트 날을 노련하게 지치는 선수들을 보며 나는 무당떠올다. 파랗게 벼린 작두날 위에 올라선 무당의 맨발. 광기에 가까운 집념이 그런 남들과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남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한 번쯤 작두를 타야 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또는 그런 선택을 강요받기도 한다. 징과 꽹과리가 요란한 가운데 감정이나 양심 같은 하찮은 잡념들은 머릿속에서 비워내라고 한다. 나는 과연 작두날 위에 오를 수 있을까? 혹 반대로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의 안락은 그 날 아래 어디엔가 있지 않을까?


1984년 여름이었다. 그때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IOC는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총회를 열고 1988년 제24회 올림픽을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그로부터 3년 뒤, 제23회 LA올림픽이 개최된 것이다. 옥상에는 양끝에 두 개의 옥탑방이 있었는데, 반대쪽 방에는 젊은 총각이 살고 있었다. 그는 더벅머리에 까만 테 안경을 쓴 채 매일 러닝셔츠와 7부 바지 바람이었다. 얼핏 옥탑방 아래 2층에 세 들어 살고 있는 가족과 집안인 듯했다. 무슨 공부를 한다고 했었는데 기억나는 것은 평상에 나와 빈둥대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부디 작두날을 타고 남의 일을 잘했거나, 자기 일을 하면서 안락하게 살고 있기를 기원한다.    


어느 날은 우리 가족과 2층 가족, 그리고 그 총각이 함께 모여 올림픽을 봤다. 지금으로 치면 컴퓨터 모니터 보다도 작은 TV를 평상 위에 설치했다. 살을 발라낸 고등어 뼈 같은 안테나에서 선을 이어 TV에 연결하고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가며 전파를 잡았다. 궁색한 부엌들로부터 수박이니, 김치전이니 하는 것들 날라졌고, 어른들은 막걸리를 마셔가며 경기를 봤다. 방 안의 열기를 피해 밖으로 나온 것인데, 한국은 오후로 접어들었지만 지구 반대편 나라는 밤늦은 시간이었다.


박수를 치고, 아쉬워하고, 무슨 메달을 땄을 때 벌떡 일어나 함성도 지르고, 선수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릴 때는 같이 울었다. 유도 95Kg급의 하형주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한국의 가족과 인터뷰하는 장면에서는 함께 웃었다. "어무이. 내 보이나? 이제 엄마 고생 끝났심니더. 진주에 가서 고생도 많이 했는데 카퍼레이드 한번 해야 되겠네." 그리고는 또 함께 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레슬링 양정모 선수가 획득한 금메달이  '대한민국 최초 올림픽 금메달'로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그데 LA 올림픽에서 금메달 6개, 은메달 6개, 동메달 7개를 따면서 종합 10위에 오르자, 국민들이 함께 일구어 온 조국의 발전을 실감하기도 했다.


당시 스포츠 강국 소련이 불참해서 행운을 얻었다는 호사가들도 있었지만, 이어서 열린 88 서울 올림픽에서 소련을 포함한 159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금 12개, 은 10개, 동 11개로 종합 4위를 차지하면서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한다. 지금도 우크라이나 침공을 하니 마니 다투는 서양 국가들은, 그때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놓고 올림픽에 무리지어 불참하는 등 냉전의 시대를 이어가고 있었다.


동계올림픽 메달의 감동과 그해 여름 올림픽의 추억, 성공 뒤의 작두날과 내 앞의 작두날, 그날 우리 가족을 찾아왔던 KBS 수금원의 집요함과 소설에 등장하는 NHK 수금원의 집요함.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주는 듯한 세상의 그 변함없음이 신기하면서도 답답하다. 그 무더운 날 평상 위에 펼쳐져 있던 궁박한 삶들과 그 소품들을 잊지 않으려 한다. 자꾸 하늘을 바라보고 싶어 안달이 날수록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잊지 말아야 하겠다. 걸어서 걸어서 가는 데까지 가는 거다.


한국인 손기정의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기억합니다. 러시아 선수들도 약 끊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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