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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칼립투스 Jul 29. 2021

삶이 순수해지는 시간

과거를 리셋하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할 때

오래전, 대학원 에세이를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이런 조언을 했던 적이 있다. 


"'나'라는 사람을 가장 잘 표현할 방법을 찾는다면, 지금까지 살면서 겪은 가장 큰 비극을 떠올려라. 그때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고, 무얼 깨달았으며, 어떤 방식으로 성장했는지 곱씹어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가장 선명해질 거다."


부끄럽게도, 당시 이런 이야기를 했던 건 진심으로 인생을 성찰하고 삶의 철학을 정립하라는 것이 아니라, 촉박한 시간 내에 수많은 지원서를 쳐내야 하는, 지극히 세속적인 이유였다. 그리고 실제 그대로 실천한 몇몇 후배들은 무난하게 합격 통지를 받아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그랬던 나에게, 최근 내 인생에 자꾸 치고 들어오는 크고 작은 불행들이 마치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오래전 에세이를 쓸 때 밀린 숙제를 하라고 독촉하는 것처럼. 비극 앞에서 진작에 만들어두었어야만 하는 내 삶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이 아직도 없기에, 조금만 바람이 세게 불어도 뿌리까지 대차게 흔들리는 것 아니냐고.  


나를 턱걸이로 합격시켜준 에세이는, 대학 시절 친구가 자살한 사연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딸 셋 중 둘째로 태어나 집안의 유일한 희망이자 기둥으로 좋은 대학을 합격하여 사법고시를 공부하던 중, 오랜 조울증과 친했던 (혹은 썸이었던) 남사친의 교통사고 사망 후 일주일 만에 수면제 과다복용 후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린 것. 장례식이 끝나고 일주일쯤 뒤에 꿈에서 본 친구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영정사진 속 풋풋한 여대생의 모습 그대로, 나에게 작별 인사하던 모습. 분명 꿈속에서 친구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는데,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별로 해준 것도 없는 나에게 고마워하던 친구의 마지막 마음을. 인생이 유한하다는 걸 처음으로 마주하고,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러고는 아주 잠깐 동안, '오늘이 소중하니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자'라고 마음먹고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도, 어찌할 수도 없는 불행이 닥쳤을 때, 나의 가장 첫 반응은 '도대체 얼마나 더 나빠질까?'인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나아지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기 전에, "어디까지 더 나빠질까"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끝장나게 괴롭히는. 머릿속으로 일단 바닥에 지하까지를 다 훑고 고통을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한 다음에, 당연히 그 고통이 내 머릿속에 있었다는 걸 잊고 끝없이 땅을 파는 식이다. 그러다 정말 큰, 또는 시급한 위기가 닥치면, 말도 안 되게 고요한 마음으로 하나씩 문제들을 도끼로 찍어내고, 칼로 베어 해결한 후, 오래도록 깊고 침울한 우울의 늪에 빠진다. 


이러니 지금까지 인생이 기로에 놓였을 때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까" 따위는 생각할 겨를 없이 "어떻게 하면 최악이 되는 것만은 피할까"를 두고 내린 결정들이 모여 나를 옭아매는 결과가 나올 수밖에. 겉으로는 쿨한 척 반골기질이 있으면서 실제로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손에 쥐가 나도록 부여잡고 인생을 살 수밖에. 


요즘은 일부러, 특별히 선택하거나 결정할 것이 없어도,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면, 난 어떤 인생을 살까"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언젠가는 결국 없어지고야 만다면, 이제 그만 힘들어해도 되는 거 아닌가"  


주변 사람들한테 욕먹기 싫어서, 나에게 대해 수군거리는 게 싫어서, 아님 그냥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어서 필요 이상으로 스스로를 조여온 건 아닐까.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될 생각도 없으면서. 


모든 고통은 언젠가는 끝난다. 그러니 지금 고통스럽다고 너무 좌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감정이 제일 소중하고,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쓰며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냥 나도, 내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내 기분을 일단 좋게 만들면 되는 것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지금, 정말이지 이젠 긴 우울의 챕터를 닫고 구름 걷힌 인생을 향해 한 발짝 내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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