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국내 이주여성이다
10년 전 미국으로 이민 오고 나서 한국보다 다소 낙후된 사회기반에 적잖이 놀랐다. 사회 대부분의 인프라가 기술 트렌드에 발맞춰 빠르게 변해가는 한국과는 달리, 미국은 큰 불편 없이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는데, 사회의 시스템 변화에 대한 저항이 큰 것처럼 보였다. 직전에 도곡동에서 살아서 인지 딸아이는 학교급식에 대한 불만부터 터져 나왔고 한국에서 가졌던 미국에 대한 막연한 기대에 대한 실망인지, 자신의 의사는 배제된 채 무작정 따라오게 된 것에 대한 불만인지 늘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나는 LA 공항에서 동쪽으로 고속도로를 타고 계속 가면서 막힘없이 펼쳐진 그 드넓은 지평선의 스케일에 완전히 압도되었고 당시 사실 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단일민족이라는 자랑스러운 구호 아래 어쩌면 중요한 유전정보체계일 수도 있는 호적 체계까지 갖추었던 한국의 동질적 사회의 지극히 주류계층으로 살다가 미국에서의 비주류로서의 첫 발은 놀라움과 불안함으로 시작되었다.
다양성이 미국 사회의 중요한 가치라는 생각과 이 가치에 기대어 다소 이민가족에 대해 우호적일 거라는 기대는 현실에서는 꼭 그렇지는 않았다. 사실 영어에 대한 준비 없이 시작된 미국에서의 삶은 눈치로 대충 때려 맞추며 살았던 반벙어리의 삶이었다. 자동응답기의 내용이 잘 안 들려서 또 걸어서 다시 들어 보고 했던 일, 전화상담직원의 말을 못 알아들어서 문의나 클레임이라도 하려면 하루 종일 진땀을 빼야 했던 일, 바트(BART)에서 모두 내리라는 안내방송을 못 알아듣고 잠만 자다가 나중에 기관사가 기관실로 데려가 이상한 emergency platform에 내려주었 던 일, 다시 되묻기가 미안해서 적당히 아는 척하며 고맙다고 한 일, 질문을 못 알아들어 동문서답한 일 등 아이들은 집에 오면 엄마의 반벙어리 영어에 불만을 늘어놓았다.
사실 아이들의 지적이 정확하다. 몇몇 단어들을 조합하며 아는 척하고 으흠 으흠하는 추임새도 사용하다가 얼마나 오해를 일으켰는지...
미국 오기 전 난 양재동 사회복지관에 있는 여러 강좌 중에서 미용 실기 강좌를 신청했다. 뭘 배운다기보다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즐거웠다. 특히, 그중에는 필리핀 이주여성 Mary Ann이 있었다. 누구와 얘기할 줄을 몰라 어색해 하는 매리앤에게 나는 다가가서 말을 걸고 포클레인 기사 일을 하는 한국남편과의 사이에 아이 셋을 놓고 잘 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에 오기 전에는 우리 아이들 물건과 책들을 친구들과 나누어 쓰라고 모두 매리앤에게 주고 왔다. 한국요리도 제법 잘 만들고 손재주가 많았던 매리앤은 그 후, 서초구에서 결혼식을 못 올린 이주여성을 위해 단체 결혼식을 근사하게 올려주는 프로그램에 나를 하객으로 초대했다.
담당공무원의 정성이 느껴지는 행사였지만, 가족들은 거의 오지 못한 채 하객이 거의 없는 10쌍의 부부들의 결혼식이 진행되었다. 아버지뻘 나이의 남편들이 대부분이었고 그중에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는 순서에서 술을 그만 먹어달라며 울면서 떠듬떠듬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어느 신부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미국에서의 나의 입장은 필리핀 이주여성의 삶이랑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 이유는 첫째 더듬거리는 나의 영어실력이 그랬고, 처음 딸아이 배구경기에서 차갑게 대하던 백인 학부모들이 그랬고, 아이의 첫 콘서트에 일찌감치 가서 좋은 자리에 앉았는데 우리 부부 옆자리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었을 때도 그랬다. 늦게 자리가 차자, 어느 백인 아줌마가 옆에 앉았고 아주 친절하게 말을 건네주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유태인 아줌마였는데 PTA회장이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우린 고등학교 첫 콘서트에서도 옆자리에 앉고 콘서트 후의 리셉션에서 함께 다과를 먹으며 친해질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사실 필리핀 이주여성쯤 돼 보이는 거야.'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그리 실망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의 다름"을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개방적인 좋은 사람들만을 골라 사귈 수 있게 걸러주는 대인관계의 선별시스템처럼 받아들이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늦었지만 언어장벽을 좀 더 낮추는데 매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한국의 필리핀 이주여성과 한국 이민자인 나의 입장을 오버랩시키게 된 또 하나의 광경들은 족히 아버지뻘이 되는 미국 할아버지들이랑 산책하며 걸어 다니는 동양인 아내의 부부들 모습을 볼 때나 미국에서 재혼한 한국 분들의 남편들을 볼 때인데, 얼핏 보기에도 나이차가 아주 많이 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었다. 나이 든 미국 노인들에게 재혼 상대로 작고 예쁘장한 한국이나 동양여성들이 선호되고 있다는 사실은 내 경험적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재혼인 경우가 많은데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하객으로 갔었던 단체 결혼식의 모습에서 느꼈던 씁쓸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민자이자 마이너로서의 미국에서의 삶에서 그나마 내가 노력했던 것은 나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인 영어와 미국 내 사회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시사 문화에 늘 관심을 갖는 것이었다. 한국 뉴스뿐만 아니라 미국의 시사에도 관심을 갖고 있으니 가끔 미국 사람들과 대화를 하더라도 사회이슈에 대한 얘기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고 그럴 때면 그들은 나에 대해 무지렁이가 아니구나 하고 조금은 다른 인식을 가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느꼈다. 또 아시아인이 없는 PTA에도 참석해서 나의 용기를 보여주곤 했다. 각자 일어나서 아이 이름 얘기하고 자기 소개해달라고 하는데, 나는 당당히 구린 영어로 우리 딸 얘기를 하며 영어가 아직 부족해서 회의할 때는 어떤 영어를 하나 궁금해서 왔다. 영어 공부하러 왔다고 얘기하고 회의 내내 귀를 쫑긋 세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한국 엄마들은 물론 미국 친구 엄마들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아이에게 적극적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이런 일을 매일 겪고 사는 아이들을 생각하고 온통 영어 투성이의 책을 들여다보고 있을 아이를 생각하면 짠한 마음까지 들었었다.
요즘 미국 사회에는 Xenophobia가 분명 표면화되어 있고, 최근 아시안 혐오범죄가 확대되면서 미국이 안고 있는 가장 중요하고도 심각한 사회문제가 인종차별 문제라는데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단일민족을 자처하던 우리 한국인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을까? 오히려 동질성이 강조되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 사회문화가 집단이나 단체의 규모나 성격을 가리지 않고 곳곳에 배어 있고 이런 사회에 세계 각국의 인구들이 몰려들면서 외모가 괜찮은 백인들에게 더 호감을 갖고 우리보다 못한 나라, 아프리카나 이름도 생소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홀대하는 모습은 우리에겐 없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인터넷이 사회계층, 지식의 격차, 국가의 차이 등과 같은 모든 경계를 허물고 있다. 이제 우리는 어쩌면 하나의 사람이란 존재 그 자체로서 외계인에 대항해야 하는, 그저 같은 인간으로서 우리를 인식해야 하는 시점까지 가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세상의 흐름에서 출신에 골몰하고 생김새에 골몰하는 우리의 모습은 구태일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자화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