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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렌더 이야기꾼 Aug 10. 2020

이방인

독전포인트

엄마가 죽었다.

그리고 햇빛이 눈이 부셔 방아쇠를 당긴 남자가 있다.

표지 속 남자는 외국인과 한국인 사이 언저리에 있는 것 같다.


이방인은 우리나라에서도 꽤나 유명한 작품이다. 번역 논쟁도 그 유명세에 한 몫했다. 이정서라는 번역가 쏘아 올린 논쟁이었지만 결국 이정서의 번역이 기존 번역보다 못한 결과물이어서 일단락됐었다.

번역 논쟁 자체는 흥미롭지 않지만 그 과정에서 한 번도 던져본 적이 없던 질문을 던지게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과연 우리가 보는 글은 온전한 글인가?


독전포인트: 햇빛은 정말 문제였을까?

책을 읽다 보면 뫼르소는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뫼르소의 일주일이 나에게는 장고한 여행기보다 길었다. 뫼르소가 엄마의 부고, 햇빛, 감옥 속의 하늘 그리고 뫼르소. 항상 다시 그에게로 회귀하곤 했다. 뫼르소의 그 메마른 건조함은 그전에 읽은 작품들 속에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십 대 초반에 처음 읽었을 때가 생각났다. 당시에는 이해가 어려웠던 뫼르소의 모습들이 조금씩 이해가 간다는 것에서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된다.


엄마의 장례식에서 흘린 눈물의 양으로 그 사람의 효심, 더 나아가 그의 인간성까지 의심할 수 있는가.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사람들은 하나의 상을 정해놓고서 뫼르소에게 그 상에 맞는 모습을 기대한 것 같았다. 그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은 보편적인 효자상 같아 보였고, 그 상 안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파렴치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눈물을 흘리지 않은 뫼르소가 삶 속에서 눈물을 다 흘린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쯤 되면 너무 뫼르소에게 과몰입하는 것 같은 모양새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결말까지 읽고 나니 뫼르소에게 마음이 기울었던 것이다.


책에 등장하는 두 명의 여자를 통해서 뫼르소의 이면을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다. 책 속의 유일한 여자들인 엄마와 마리를 대하는 뫼르소의 독백은 관점에 따라 예의 없을 수도, 차가울 수도, 건조할 수도 있다.


냉소적 반응. 그것으로 끝났다면 뫼르소는 나에게 그냥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감옥에서 온전히 혼자가 되었을 때에 모습이었다. 밤낮의 경계 없이 사색하는 그의 모습은 이전에 보았던 뫼르소의 모습과는 달라보였다. 그만의 감수성이 있던 것이다. 밤하늘을 세고, 해의 시작을 담아내는 그의 감수성은 낭만적이기까지 했다. 뫼르소의 감정을 모두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없는 것이 아니지만 때로는 모두가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규탄의 대상이 돼버리는 것 같다.


독전포인트: 뫼르소가 느낀 것은 무엇인가?

사실 인간성이 제거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뫼르소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거짓말을 못하는 병에 걸렸던 것이 아닐까? 우리들은 해 뜰 날이 올 것을 믿으며 다들 이 힘든 순간을 이겨내려고 하지 않던가. 그렇게 희망에 대한 믿음은 거대해지기도 하는데 마치 삶의 어둠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굴게 만든다. 뫼르소는 다수가 본 측면을 본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로 쓰고 싶은 생각이긴 하지만 ‘해뜰날’은 상당히 흥미롭다. 단어 안에 해가 아직 뜨지 않은 상태와 다가오지 않은 미래까지 포함하고 있다. 해뜰날은 흔한 단어가 되어버렸지만 우리에게 더 가까운 개념은 해뜬날과 흐린날이다. 해뜰날은 오지 않을 수도 있으며 이미 온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의 힘듦이, 현재 삶의 어두운 부분이 걷치지 않은 채 계속된다면 우리는 계속 해뜰날을 기다릴 수 있을까? 해가 뜨지 않는 부당함을 견딜 수 있을까?


뫼르소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고 기대하는 해뜰날에 대한 일말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 쪽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어떻게 보면 그는 이미 해뜬날을 정확하게 느낀 것이고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조금(혹은 많이) 흐린다한들 개의치 않는 것이다. 뫼르소의 결과적 죄에 대해서는 대가를 치뤄야함이 명백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느끼는 불쾌감은 그가 진짜로 행한 죄에 대한 이야기보다 그가 남들처럼 느끼지 못한, 그래서 이상한 사람임을 증명하는데에 치중된 것에서 비롯된다. 마녀사냥인 것이다.


뫼르소는 살인에 대한 반성을 느껴야 하고, 사람들은 뫼르소가 생각했을 해 떴지만 흐린날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독전포인트: 살인자로서 뫼르소.

어떠한 죄책감은 보이지 않지만 판결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만약 부정했다면 그는 비겁한 사람이었을 테지만 뫼르소는 비겁한 편에 속하지 않는다.


‘나는 죄가 없소’라는 흔한 항변은 없다. 그는 흐린날의 종식을 선언한 것이다. 해가 뜨지 않아도 상관없이 흐린 날의 끝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뫼르소에 대해서 살인자였어도 비겁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죄질이 구려도 비겁하지 않은 자와 선고받지 않는 비겁한 사람 중에 누가 더 나을지 고민이 되긴 했다.


살인자의 최후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누군가로 뫼르소는 존재할 것이다. 누군가는 그렇게 흐린날 속에서 담담히 걸어갈 것이다.


총평

이방인을 읽으면서 나는 온전히 이해하는 날이 오길 기다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나의 헛소리들, 오지 않는 희망에 지금의 절망을 부정하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천천히 절망에 젖어가는 줄도 모르고 살아왔다. 남들처럼 희망찬 내일을 기대하며 살아가면 좋은 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위선을 기억하며 흐린 날을 걸어가는 것이 더 당당한 내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뫼르소가 나에게 던진 것은 거대해 보이는 다수의 믿음에 대한 반기였다. 그가 보여준 모습은 보편적인 인간상은 아니었지만 그의 삶에 거짓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카뮈의 서문처럼 ‘꽤나 솔직했던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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