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프롤로그_ 그 누구보다도 바빴던 나의 여행
인정한다.
난 지독하게 집 밖에 모르는 집러버, '집순이'다.
집에서 딱히 하는 건 없다.
그냥 작지만 익숙한 내 공간과 가끔 공사 소리와 대로변 위 사이렌 소리에 놀라 잠을 깨기도 하지만 그래도 오로지 나 혼자 있는 나의 집을 너무 사랑한다.
가능한 한 번의 외출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고,
되도록 약속을 잘 잡지 않으며
당일 약속 취소도 잠깐 분노하고 금방 행복함을 느끼는 집순이의 조건을 잘 갖추었다.
그러나, 나는 여행을 사랑한다.
어렸을 때부터 여행가 한비야의 책을 읽고 자랐고
세계 곳곳을 누비며 다양한 것들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묻는다.
"집순이가 왜 이렇게 여행을 좋아해?"
사실 나도 의문이었다.
집 앞 슈퍼도 나가기 귀찮아 배민 마트에서 주문을 하고
외출할 일이 생기면 그날 하루에 모든 볼일을 끝내야만 하는 지독한 집순이인 내가
그보다 더 귀찮은 여행을 왜 좋아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 내가 그동안 다녔던 여행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국내여행보다는 해외여행을 많이 했었는데
사실 생각해보면 웃긴다.
집 밖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면서 비행기 타고 외국 가는 것은 좋아하다니.
그렇다면 과연,
"집순이는 어떻게 여행할까?"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니 여행가도 숙소에만 하루 종일 있으면서 호캉스를 즐길까?
아니면 이왕 나온 김에 더 많은 것을 경험하려고 할까?
나의 경우 후자이다.
물론, 모든 집순이들의 여행은 나와 같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나의 경우 집에 있을 때의 자아와 여행 갔을 때의 자아가 다르다.
집에서 손가락 까딱하지 않고 누워 있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여행만 가면 발과 종아리가 퉁퉁 부을 정도로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 밖 순이로 변신하다.
특히, 나는 쉬는 여행은 잘하지 않는다.
항상 이번에는 여행 가서 편안하게 스트레스를 풀고 올 거야 다짐하며 여행을 떠나도
어느새 구글맵 하나 들고 어딘지도 모르는 정류장에서 헤매면서 스트레스받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아일랜드 어학연수 당시 단 3일 동안 영국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당시 나는 한인 민박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나와 같이 어학연수를 하던 동기가
그 숙소를 다시 방문했을 때 민박 주인은 나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 혼자 새벽같이 나가서 밤늦게 돌아오시는 분?"
당시 3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영국을 즐기겠다는 생각에
나 혼자 여행을 갔음에도 나는 정말 시간을 꽉꽉 채워서 런던 곳곳을 누볐던 것이다.
이 때문에 같이 방을 쓰는 여행객들의 얼굴은 보기 힘들었고
한식으로 나오던 조식조차 편안하게 즐기지 못하고 혼자 매우 바쁜 여행을 했었다.
돌아보면 나는 항상 바쁘디 바쁜 여행을 했었다.
한 번 외출을 했을 때 모든 일을 다 해결하려는 것처럼
한 번 여행 갔을 때 그 도시의 모든 것을 경험하겠다는 나의 의지였다.
집순이인 나는 집에서 차곡차곡 쌓아둔 에너지를 여행을 통해 펑하고 터뜨렸던 것이다.
그 결과, 코로나로 하늘길이 막혀 정말 집에만 있게 되었을 때
여행하던 당시의 다이내믹했던 기억들로 그 긴 시간들을 버티게 되었다.
이제 에너지를 다 충전했으니 다니 떠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