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 예방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며 진행된 콘서트에 그 수칙들을 철저히 지키는 1인으로 다녀온 후기입니다. ]
신종 고문이다. 에픽하이 공연에서 함성 지르지 않기, 일어나지 않기.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건강 박수 이천 번을 훌쩍 넘기고 공연은 끝이 났다. 밖에는 흰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 타블로 조정린의 친한 친구를 들으면서 자란 나는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매일 누군가에게 희망과 용기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매일을 노래하는 타블로와 그의 노래들을 좋아했었다. 친구가 "에픽하이 콘서트 자리 잡았어. 갈래?" 언젠지도 모르고 몇 시인지도 모르고 "어. 입금할게. 가자." 그렇게 코시국에 우리는 겁도 없이 콘서트를 가게 됐다.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사실 소리 안 지르는 게 힘들 거라는 생각보다 일단 콘서트를 해준다는 게 감사하다는 느낌이 컸다. 지난 금요일에 4단계 방역 강화 지침이 나올 때도 콘서트 취소가 될까 봐 조마조마했던 것도 생각해보면 '함성 금지 콘서트'가 큰 걸림돌이 될 거라고 생각조차 못했는데, 게스트로 다이나믹 듀오가 나오고 불꽃이 터지는데 소리를 못 지르는 게 너무 괴로울 지경이었다. 나도 모르게 악 소리가 날 뻔 한 걸 친구가 입을 틀어막아줘서 겨우 참아냈다.(아니지ㅠ 참음 당했다ㅠ)
"앉아서도 정말 다 하시네요" 이 시국 콘서트가 처음인 건 가수들도 마찬가지니까. "미쓰라! 소리 질러!" 함성은 미쓰라만 지르는 콘서트, 물 뿌리지 않는 콘서트는 에픽하이도 그들의 역사상 처음이었으니까. 그런 가수들이 카메라만 있어서 어색했는데 그래도 눈을 볼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해줘서 고마웠고, 우리를 그리워했다고 말해줘서 고마웠고, 우리의 목소리가 빠져서 아쉽다고 말해줘서, 에픽하이의 노래는 우리로 하여금 완성되는 거라고 말해줘서 고마웠다.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학교 점심시간에 나오던 FLY, 짝사랑할 때 들었던 LOVE LOVE LOVE, 비 올 때 꼭 듣던 우산, 원, 팬, 1분 1초, 본 헤이터... mp3 버튼을 꾹꾹 눌러가며 질풍노도의 시기를 (나름대로) 잘 보낼 수 있도록 나를 책임져 준 세 오빠들... 딱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노래는 정말 힘이 세다.
그런 와중에 또 과거의 우리를 불러와서 노래를 부를 거라고 했는데, 그 연출이 정말 좋았다. '이 함성은 여러분이 행복하던 어느 때의 함성입니다.' 옛날 콘서트 음성을 따서 얹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부를 수밖에 없었을 노래인 우산을 이렇게 연출하다니.
나는 과거에 사는 사람이고 싶지 않은데 코로나 이후로는 자꾸 현재나 미래보다는 과거에 연연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다. 구질구질하고 싶지 않은데... 코로나 창궐 2년이 지나도록 질척거리고 있는 중이다. 라떼는 말이야, 하면서 새벽 사녹과 공방, 스탠딩 1열에서 멍들던 때, 시작만 하면 같이 다녔던 해외 투어를 추억했고, 그런 추억팔이가 오히려 일상 같았다. 그리워 사무칠 만큼 소중했던 기억, 잊지 못할 추억이라는 뜻이겠지.
앙코르 중에 사진첩이 나왔는데 뒤에 콘서트를 준비하거나 곡을 녹음하는 모습들을 보여줬다. 그래.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야지. 지금 여기, 에픽하이가 있다.에픽하이가 어둡고 축축한 노래를 내도 좋은 건, 그들이 희망의 메신저라는 걸 나는 이미 너무 잘 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이 시간도 추억 같은 게 되겠지. "야 진짜 그때 코로나 심해서 우리 에픽하이 콘서트 가서 소리도 못 지르고 좌석에서 앉아갖고 공연 봤잖냐~"하고 썰 풀듯이 이야기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라도 즐길 수 있게 해 준 에픽하이에 감사. Peace.
+ 그리고 왜 이렇게 짧았나 했더니... 내가 체력이 남아 돌아서... ㅠ 이런 콘서트 증말 처음이얌...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