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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사각 Oct 18. 2020

졸업

꽃다발, 졸업 가운, 멋진 가죽 폴더에 담겨있는 졸업장, 나를 보며 축하해주는 가족들,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교수님들, 그리고 함께 그 순간을 만끽할 친구들. 내가 꿈꾸던 졸업식이었다. 특히 내 졸업식에 엄마는 물론이고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고모와 고모부까지 모두 오신다고 해서 줄곧 기대하고 있었다. 타지에 있다 보면 가족의 품이 그립기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4년간 살아왔던 공간을 소개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설렜다. 4학년의 마지막 학기가 시작함과 동시에 내 기대감은 점점 더 커져갔고 졸업 논문을 쓰는 힘든 과정을 버티게 해 주는 동기가 되었다. 


2020년 1월 21일, 이 세상에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바이러스가 출몰했다. 처음에는 우한 폐렴으로 알려진 이 바이러스는 이제 당당히 코로나바이러스(COVID-19)라는 이름까지 따 내며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위험을 체감한 국가 중 하나가 한국이었다. 미국에서 난 매일같이 한국의 소식을 접하며 불안해함과 동시에 지금 미국에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멀쩡하게 학교를 다니며 예전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괜찮을 줄 알았다. 


2020년 3월 초. 그즈음 학교에서 4학년들을 위해 파티를 열어 주었고 이를 시작으로 졸업 이벤트가 줄줄이 이어질 예정이었다. 나는 ‘안티고네'라는 연극 공연에 무대감독으로 참여하고 있었고, 그다음 주에 있을 봄방학 동안 뉴욕에서 3일을 보내고 미국 중부로 가 합격한 대학원을 방문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바쁜 일상과 함께 들려오는 뉴스 속보: 9일, 갑자기 미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자 수가 급증하고 있다는 내용.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3월 9일, 하버드나 버클리 같은 미국의 큰 대학들이 수업을 중단하고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 학교는 매우 시골에 있고 규모 또한 다른 학교들에 비해 작은 편이니 불안한 마음은 들었지만 그래도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3월 10일, 우리 학교에서 공식적인 발표가 났다. 우선 봄방학 이후 2주간은 온라인 수업을 하고 그 이후에 다시 캠퍼스에 돌아와 정상 작동을 할 것이라고 했다. 학생들은 두 파로 갈라져 논쟁을 벌였다. 나와 같은 4학년들은 이렇게라도 마지막 학기를 마무리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 좋다는 의견을 냈고 다른 학년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며 아예 모두 온라인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안 그래도 공연 때문에 바쁜 와중에 봄방학 일정을 모두 취소해야 하나 고민까지 해야 했고 계속 존재하는 불안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3월 12일, 공식 발표를 낸지 이틀 만에 학교는 입장을 다시 바꿨다. 봄방학이 끝날 때까지 시간을 줄 테니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고, 그 이후 학기가 끝날 때까지 모두 온라인 수업으로 돌리겠다고. 희망고문은 참 잔인한 일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희망을 품고 있었던 내게 이 소식은 청천벽력이었다. 졸업식은 나중에 결정을 내리겠다고 했지만 모두 알고 있었다. 졸업식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내게 이번 졸업식은 좀 특별한 의미였다. 대학 4년간 이룬 것이 되게 많았고 스스로 자랑스러운 일도 많았다. 많이 힘들었고 또 꾸준히 이겨내었다. 졸업식을 통해 남들에게 인정받고 또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는 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대했었다. 비록 아빠는 함께하지 못하지만 가족들 모두가 나를 위해 모여주는 거. 그 특별함을 누리고 싶었다. 당연히 누릴 수 있고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버텨왔는데,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래서 코로나 때문에 졸업이 취소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더 무너졌었나 보다. 미친 듯이 울었고, 세상을 원망했고, 내 처지를 한탄했다. 차마 코로나로 인해 생명을 위협받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사람들에 비하면 내 슬픔은 비교조차 안되지만 나는 슬펐고 마음이 아팠고 그 감정을 추스를 마음이 없었다. 


그 발표가 난 이후 한 4일간 내 눈에 눈물이 마르는 순간이 없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부둥켜안고 울었고, 교수님들께도 돌아가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정이 들었던 동아리 사람들과도 마지막 모임을 했고, 4년간 내 곁을 지켜주던 친구들과도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내 감정은 롤러코스터를 탄 것 만약 주체가 안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특히 거의 대부분의 4학년들은, 인생을 놓아버린 것처럼 미친 듯이 울었고 마지막인 것처럼 파티를 했고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다는 것을 나중에 다 알게 되었지만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작별인사를 했다. 내 대학시절은 이렇게 허무하고 안타깝게 끝이 났다. 


다행히 국제학생들이나 개인적인 집안 사정으로 돌아갈 수 없는 학생들은 학교에 남을 수 있게 해 주었다. 난 한국으로 돌아갈까 고민하다 이렇게 순식간에 떠나버리는 건 아니라고 생각이 되어 학교에 남아 마지막 학기를 마치기로 했다. 학교는 매끼 식사를 챙겨주고 확진자가 나왔을 때 자가 격리를 도와주며 우리를 끝까지 책임을 졌다. 어느 정도 진정을 하고 나서 보니 고요한 캠퍼스에 남아 있는 것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졸업 논문 두 편과 발표를 만족스럽게 끝내고, 자기 계발도 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도 많이 갖고, 운동도 하고... 내가 계획한 방식은 아니었지만 다른 방식으로 지난 4년을 돌아보고 감사히 여기고 나를 토닥이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 그렇게 이 곳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5월 16일 나는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내 졸업식은 한국에서 자가격리 중 새벽 4시, 모두가 잠든 시간에 일어났다. 혼자 내 방 침대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며 나는 공식적으로 학생에서 졸업생이 되었다. 내 이름과 사진이 담긴 파워포인트 한 장. 그리고 몇 주 뒤 택배로 배송된 졸업장과 학교 스웨터. 다이내믹한 4년에 비해 조촐한 끝맺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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