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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사각 Nov 01. 2020

다수에서 소수가 된다는 건

두 번째 이야기



어린아이 때부터 우리는 낯선 것을 경계한다. 일말의 호기심과 동시에 피어나는 두려움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다가오면 울음을 터트리고 낯익은 부모님의 품을 찾게 된다. 동물이라면 누구나 지닌 본능이다. 생존본능. 위험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자 자연이 만들어준 본능. 우리는 우리와 같은 것에, 익숙한 것에 둘러싸여 있음에 안심을 하고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사람의 삶은 단순히 생존본능에만 의지할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우리는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고 그 과정에서 수없이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종종 낯선 곳, 낯선 사람을 맞닥뜨리고 두려움을 이겨내며 적응해나가야 한다. 머리로는 잘 알지만 막상 그런 상황에 닥쳤을 때 우리는 당황을 하고, 실수를 한다. 나아가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상처 입힐 수도 있다. 나의 이런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상처일지도

이런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지금까지는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면, 이번에는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마주했던 새로운 사람들, 낯선 문화, 달라진 주변 환경에 의해 달라지는 나,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고받았던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와 위로들. 그리고 또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돌아보는 내 소중한 추억들.




난 항상 다수에 속한 삶을 살아왔다. 부족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부유하다고도 할 수 없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충분한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나와 남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만큼 공부를 했으며 원만한 친구들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정말 흔하고 평범한, 삶에 만족하지만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는 나날이 계속되던 중, 우리 가족은 갑작스럽게 미국에 1년간 살게 되었고, 내 안일했던 세상은 처음으로 깨지고 말았다. 나는 13살이었다.

아빠가 직장에서 발령을 받는 탓에 우리는 미국 중부에 있는 미주리 주에 1년간 정착하게 되었다. 내게 익숙한 뉴욕이나 LA, 시카고 같은 대도시가 아니라 시골의 작은 마을에 도착한 우리는 너무나도 눈에 띄는 존재였다. 어딜 가든 나와 다르게 생긴 사람들뿐이었고, 익숙하지 않은 영어가 들려왔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나와 비슷하게 생긴 친구들에게 익숙해져 있던 나는 처음으로 머리 색, 피부색, 그리고 눈동자 색까지 가지 각각 다른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영어를 아예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원하는 말을 하고 싶을 만큼 능숙하지 않았고 창피한 일을 당할까 봐 한동안 입을 닫고 살았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나서야 하는데 그럴 만한 성격이 되지도 못했고.

일은 학교 첫날부터 터졌다. 등하교를 스쿨버스를 타고 했는데 처음이니 등교할 때는 아빠가 데려다주셨고 전달받은 스쿨버스 번호를 알려 주시며 이 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 된다고 내게 당부했다. 어찌어찌 첫날이 끝나고 많은 학생들은 밖에 나와 각자 자신의 스쿨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내 버스가 오지 않았다. 넓은 버스 승강장을 열심히 뛰어다니며 내 버스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버스가 떠나가고, 나는 혼자 남았다. 버스 탑승을 지도하던 선생님이 내게 다가왔다.

“버스를 타지 못했니? 버스 번호가 뭐야?”

“29번이요.”

손에 들고 있던 클립보드를 열심히 들여다보던 그 선생님을 내게 말했다.

“흠… 29번 버스는 우리 학교에 오지 않는데?”

순간 너무 당황한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집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핸드폰도 없고. 내 얼굴에서 패닉을 읽은 선생님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모님 번호 알지? 행정실에 가서 전화할래?”

키가 크고 숏컷의 금발머리를 하고 있던 50대 백인 여자 선생님은 분명 나를 따뜻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게 난 그렇게 무서웠다. 상황에 대한 무서움이었을까. 다름에서 나오는 괴리감이었을까. 앞으로 1년 동안 이곳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두려움이었을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생님과 함께 행정실로 들어갔다.

행정실 벽에 붙어 있던 전화기를 들고 겨우겨우 기억해낸 아빠 전화번호를 누르려고 했는데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시도해 보았지만 그대로였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바빠 내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몇 번 더 시도하다 안된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행정실 밖에 나를 인도해 주시던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

“전화는 잘했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 한 통도 못하는 어리숙한 동양인 여자아이가 되기 싫었고,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려면 영어로 긴 문장을 말해야 하는데 더듬지 않고 할 자신이 없어 나는 바보처럼 괜찮은 척하고 밖으로 나왔다.

무작정 부모님을 기다렸다. 언젠가는 와 주겠지. 딸이 집에 안 오고 있으면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알아서 데리러 오지 않을까. 어떻게든 난 집에 갈 수 있지 않을까. 밖에 있는 벤치에 앉아 무작정 기다렸다. 1월, 한겨울의 추운 바람을 맞으며, 나는 너무나도 집으로, 한국으로, 익숙한 것들이 잔뜩 있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아빠는 2시간쯤 뒤에 날 데리러 왔고, 스쿨버스 회사에 전화를 걸어 크게 화를 냈고, 난 다음 날부터 스쿨버스에 올라타 학교에 갔다. 그렇게 하나하나씩 낯선 것들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친구가 생겼고, 영어도 점점 늘었으며, 혼자 발을 동동 구르지 않고 곤란한 상황에는 도움을 청하는 법을 배웠다. 아직도 ‘다르게 생긴 동양인 아이’였지만 어느 정도 그 생활에, 그 문화에 적응해 나갔다.

1년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난 반대로 모든 사람들이 비슷하게 생겼고 비슷한 머리 색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오랜만에 듣는 한국어와 익숙한 모습들은 내게 포근함을 안겨주었다. 아, 어디엔가 소속된다는 건 참 따뜻한 일이다.



다수에서 소수로, 그리고 다시 다수의 삶으로. 이 이후로 내 삶은 이의 반복이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알아간다는 것. 더 이상 내가 ‘우리'의 범주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 다양한 정체성이 요동치며 내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 그 과정에서 겪었던 수많은 차별, 그러면서 돌아보게 되는 내 안에 내재되어 있던 편견들. 껍질을 부수고 세상에 나가는 한 아이의 성장기라 여겨주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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