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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리릭 Sep 11. 2023

31화 - 미래는 자연스럽게 택시를 탔다

첫사랑과 끝사랑 사이 어딘가(소설)

 “오늘? 갑자기?”

 “응. 오늘 내가 쏠게!”

 “공돈이라도 생겼어?”

 “내가 맨날 얻어먹기만 했으니까 나도 한 번쯤은 쏴야지. 먹은 지 오래되기도 했고.”


 당연히 공돈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내 유일한 비상금은 세뱃돈이다. 천만다행으로 어렸을 때부터 세뱃돈만큼은 엄마가 건드리지 않았다. 설에 받은 세뱃돈과 얼마 안 되는 용돈으로 1년 동안 계획적으로 자금을 운영해야 한다.    


 이제 겨우 5월인데 이모 탕수육에 꽤 큰 금액을 지불하는 건 맞다. 지금까지 5월에 이렇게 큰 금액을 써본 적은 없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비상금은 최대한 안 쓰다가 보통 11월, 12월에 내가 사고 싶은 것들을 샀었다.      


 하지만 지금은 비상금을 써야 할 때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미래는 아무렇지 않게 날 대하고 있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않다. 이렇게 찝찝한 관계는 공부에 심각한 방해가 된다. 깔끔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분위기가 괜찮으면 오늘 미래와 세 번째 눈맞춤도 시도해 보려고 한다. 미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다.          

 “어머! 유준이네! 미래야! 연락도 없이 갑자기 왔어?”

 “응! 이모! 유준이가 쏜다 길래 왔지~!”   

  

 미래 이모는 여전한 미소로 우리를 반겨줬다.     


 “그런데 어떡하지? 너네가 갑자기 와서 오늘은 룸 자리는 없네. 오늘 아주머니들 모임이 여러 개 예약 돼버려서. 미안하지만 오늘은 홀에 앉아야겠다. 대신에 이모가 서비스 많이 줄게!”


 이모는 내게 환하게 웃어주며 홀로 자리를 안내해 줬다.     


 “뭐가 미안해~ 우리 둘이 룸에 앉았던 것이 미안하지. 걱정 마. 우리는 어디서든 잘 먹으니까! 특히 유준이는!”          


 앗... 계획에 커다란 변수가 생겼다. 룸에 들어가지 못하면 눈맞춤을 시도할 수 없다. 홀에서 시도했다가는 다른 사람들까지 멈춰버려서 바로 미래가 알아챌 텐데... 물론 알더라도 어차피 눈맞춤 시간이 끝나면 기억을 못 하니까 상관없을 수 있다. 문제는 상대가 미래라는 것이다. 미래는 세상이 멈췄다는 걸 절대 쉽게 수긍할 사람이 아니다. 나는 수많은 질문 공세에 시달려야 할 테고 내가 미래에게 진심 어린 질문을 할 기회 따위는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이것도 운명인 것을... 탕수육이나 열심히 먹어야겠다!   


 이모 탕수육은 언제 먹어도 행복하다. 이 마법 같은 소스는 대체 어떻게 만드는 걸까... 비싼 만큼 고기도 엄청 좋은 것만을 쓰는 것 같다. 역시 비싼 건 음식이든 물건이든 실망시킬 확률이 매우 낮다.      

     

 한참을 정신없이 탕수육을 먹다가 탕수육이 3개가 남았을 때 정신을 차렸다. 내가 오늘 여기 온 목적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온전히 탕수육만을 먹기 위해 여기를 왔다고 하기에는 내 비상금 대비 탕수육 가격이 너무 비싸다. 미래는 저녁을 먹고 바로 집에 가봐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비록 룸은 아니지만 미래와 이야기를 나눠봐야 한다. 어차피 이런 고급스러운 식당에 우리 학교 애들이 있을 리는 없다.        

  

 “미래야. 있잖아...”

 오늘은 꼭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건만 막상 미래의 이름을 부르니 말이 멈춰버렸다. 잠깐 호흡을 고르고 머리를 한 번 쓸었다.      


 “수련회 때 너는 술 안 취했었어? 밤에 있었던 일 다 기억나?”

 “술? 아... 한 잔 마셨었구나. 사실 그 양을 한 잔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우리 집안이 원래 술이 강해서. 난 아무렇지도 않던데?”     


 그래, 그날 취했던 건 나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태어나서 술이라는 걸 처음 먹어본 건데... 정신이 몽롱하더라. 내가 뭐라고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래? 그럼 내가 널 가장 괜찮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던 것도 기억 안 나?”

 “응? 아... 그건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뭐야. 기억도 못할 거 괜히 말했네.”

 “아니야! 또렷하게 기억해!”     


 나는 서둘러 대답하며 미래의 눈치를 봤다.   


 “근데 네가 무슨 말했는지 기억 못 해? 뭐라고 했는지 궁금해? 내가 다시 말해줄까?”

 “아니!”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버렸다. 내 옆 테이블에 앉은 아저씨가 나를 한 번 힐끔 쳐다봤다.    

 

 “말 안 해줘도 돼. 몽롱한 상태에서 그냥 헛소리 한 걸 굳이 다시 안 들어도 되지...”

 “헛소리였어? 아쉽네. 나 그래도 100점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점수 차이가 별로 안 난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어차피 넌 기억이 안 난다고 하니 내가 무슨 말하는지도 모르겠구나.”  


 분명 지금 눈맞춤 시간이 아닌데 미래는 속마음을 다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나는 아까부터 쩔쩔매고 있고. 근데 아까 분명히 미래가 했던 말은 별 의미가 없다고 했었는데... 이건 또 뭘까. 미래는 날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완전히 헛다리 짚고 있는 건가...?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 이제 슬슬 일어나 봐야겠다.”

 “그래. 오늘은 내가 쏠게!”

 “그 말을 오늘만 몇 번째 듣는지 모르겠네. 맛있게 잘 먹었어 장유준님!”     


 미래가 눈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일어나려 할 때 내 뒤쪽에서 큰 그림자가 느껴졌다.


 “미래야! 탕수육 먹으러 왔어?”

 “어? 현수 오빠! 언제 왔어? 여기서 또 만나네!”

 “공부 잘하고 있지? 아! 다음 주에 별장 오나?”

 “아직 잘 모르겠어. 다다음주에 수행평가 있어서. 오빠는 대학생이라서 좋겠네.”

 “나도 그런 시기가 있었지. 내후년이면 나도 다시 그런 시기가 올 것 같으니 지금 열심히 놀아야지. 옆에 있는 친구는 같은 반?”     


 그 큰 그림자는 나를 쳐다봤고 나는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미래 친구 장유준입니다.”

 “반가워.”     

 “미래야! 혹시 마음 바뀌어서 별장 오게 되면 연락해. 너 좋아하는 하몽이랑 멜론 사가지고 갈 테니까.”

 “알았어 오빠! 또 봐!”

 “그리고 너희 음식 값은 내가 이미 냈어! 간다!”

 “대박! 완전 고마워 오빠! 잘 가!”         

 

 미래는 더없이 밝은 미소를 그 큰 그림자에게 보내줬다. 제기랄... 미래한테 내가 탕수육 한 번 사겠다는데... 오늘만 그 이야기를 10번은 한 것 같은데... 이 기회를 또 날리네.  


 저 큰 그림자는 내 비상금을 굳게 해줬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보다 등치가 큰 것도 별로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얼굴과 말투 곳곳에서 허세가 느껴진다.  


 근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티가 가득하긴 했다. 명품 브랜드를 잘 모르지만 그 큰 그림자가 하고 있던 시계, 구두, 옷 모두 가격이 꽤 나갈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탕수육 정도는 하찮게 느껴질 만큼... 게다가 별장이라니. <호텔왕 게임>에서나 볼 수 있었던 별장을 실제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처음 본다.           


 “누구야?”

 “아, 우리 아빠 의대 동기 중에 가장 친한 분 아들이야. 지금 서울대 의대 1학년. 본과 가면 본격적으로 공부해야 한다고 지금 어찌나 재밌게 놀던지 부럽더라고.”

 “근데 별장 같은데도 가고 그래?”

 “그거 아빠 의대 동기 몇 명이서 돈 모아서 사놓은 별장이야. 필요할 때마다 가서 사용하고 그래. 저번에 자식들끼리 한 번 모여서 놀았거든.”     


 갑자기 미래 주변에 철벽... 아니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높이의 벽에 세워진 것 같다. 나는 미래의 머리카락 하나 볼 수 없을 만큼 미래는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만 같다. 저번에 미래 집을 보면서도 느꼈던 감정을 오늘 다시 한번 느낀다.          


 “그나저나 너 다음에 다시 쏴! 오늘 건 무효! 얼른 나가자. 나 늦겠어.”    


 미래는 늦었다며 택시를 타고 갔다. 난 지금까지 내 돈으로 택시를 타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버스를 타도 되고 걸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데 굳이 내 용돈을 쪼개서 비싼 택시비를 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미래는 너무 자연스럽게 택시를 탔다. 그 어떤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그 정도 집에서 살 정도면 택시비 정도는 푼돈일 테지.           


 내가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하면 미래와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내가 미래가 사는 고급스러운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아까 그 큰 그림자와 미래는 이미 그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탕수육을 사지 못해 돈이 굳었지만 이상하게 더 씁쓸해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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