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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리릭 Sep 07. 2023

30화 - 내 한마디로 관계가 복잡해졌다

첫사랑과 끝사랑 사이 어딘가(소설)

 “그러면 라영이는? 라영이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라영이는 몇 점인데?”  


 “라영이는... 120점이지.”           

 사실 내가 이렇게 말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정혁이와 영만이가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다음 날 증언해 줬을 뿐. 그날 난 이 말과 함께 잠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한마디로 라영이와의 관계가 복잡해졌다. 미래와의 관계도.       


 수련회가 금요일에 끝나서 다행이었던 것 같다. 수련회 바로 다음 날 학교에 갔으면 꽤나 민망했을 텐데... 다행히 주말 동안의 시간을 벌었다.           


 수련회가 끝나면 다시 마음잡고 정말 열심히 공부를 다시 시작하려고 했는데 첫날부터 쉽지 않다. 작심삼일은커녕 작심일일로 끝날 태세다.      

    

 그래도 마음을 붙잡고자 독서실로 향했다. 수련회의 피로감이 여전히 몸 구석구석에 남아있었지만 그걸 핑계로 또 누울 수는 없었다. 게다가 동생한테 물어보니 오늘은 엄마가 약속이 없다고 했다. 주말에 엄마와 하루 종일 붙어있는 건 최악이다. 엄마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독서실로 가는 것이 마음 편했다.   

       

 하기 싫은 공부였지만 막상 시작하니 생각보다 할만했다. 수학 문제가 오늘따라 잘 풀리니 기분이 좋아졌다. 남들은 다 놀고 있을 텐데 나 혼자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뿌듯하기도 했고.        

   

 내가 목표로 한 시간을 넘겨서 공부를 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무한한 뿌듯함을 느끼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니 정혁이었다.          


  “헐?”          

 정혁이는 조용히 하라는 손가락과 함께 밖으로 나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어차피 점심 먹을 시간도 됐고 해서 우리는 분식집에 자리를 잡았다.          


 “너 아침부터 독서실 온 거야?”

 “응. 이제 다시 1등 해야지. 너도 공부하러 왔어?”

 “아. 나는 아침에 운동 갔다가 책이나 좀 읽을까 하고 왔어.”     

     

 수련회 이후 아무와도 연락하지 않았었다. 미래와 라영이의 말에 행복했었지만 내가 뱉은 말도 생각해야 했다. 기억이 또렷하지 않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 정혁이와 영만이가 알려주기는 했지만 나 스스로의 기억은 헷갈렸다.          


 김밥 4줄을 순식간에 해치운 우리는 조금 걷기로 했다. 날씨도 따뜻하고 소화를 시킬 필요도 있었다. 한동안의 침묵을 깬 건 정혁이었다.          


 “유준아! 궁금한 게 있는데... 미래는 100점, 라영이는 120점. 이게 네 진심이야?”               

 정혁이는 본인은 여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지만, 내 마음이 조금은 궁금하긴 한가 보다. 이런 질문을 다 하고...          


 “근데 내가 진짜 그렇게 말했어?”

 “몇 번을 말해. 나도, 영만이도, 거기 있는 여자애들도 모두 똑똑히 들었어.”    


 내가 정말 그렇게 말했구나...          


 “근데 유준아. 네가 라영이를 좋아하는 것과 상관없이 넌 미래한테 꼭 사과해라. 그 말 듣고 얼마나 민망하고 기분 안 좋았겠어. 미래가 착해서 다행이지 나 같았으면 이미 한 방 때렸다.”

 “진짜 미래한테 죽을죄를 지은 것만 같다. 술이 원수지... 내가 왜 그걸 마셔가지고 후...”

 “네가 마신 걸 술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정혁이는 차가운 남자다.       

   

 “미래한테 아직 연락 안 했어?”

 “못했지. 어제는 너무 피곤해서 일찍 뻗었고. 아침부터 연락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그냥 공부했지.”          

 미래한테 연락하기 싫어서 오늘 공부가 더 잘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심하다 장유준.    


 “꼭 연락해라. 내가 여자도, 연애도 잘 모르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야. 기본의 문제야.”

 “알아. 나도 알지. 이따 연락해야지.”

 “라영이는? 라영이한테도 연락 안 했어?”

 “어. 어제 그냥 다 잊고 싶었나 봐. 그냥 자버렸더니 눈 뜨니까 아침이더라.”     

     

 남들 앞에서는 대담하고 말도 잘하는데 정작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말을 못 하겠다. 라영이의 마음을 확인하니까 라영이가 더 어려워졌다. 당장 다음 주에 학교 가서 라영이 옆에 어떻게 앉아있을지 자신이 없다.          

 “정혁아! 오후엔 뭐 할 거야?”

 “나? 오후에 축구 레슨 받으러 갈 거야.”     


 그래. 정혁이가 여자친구가 없는 이유는 이거다. 내가 알기로 정혁이를 좋아하는 여자는 나라를 포함해서 전교에 두 자릿수는 될 텐데. 심지어 우리 반에서만 5표를 받았는데. 정혁이는 아직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 처음에는 없는 척하는 건 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정혁이는 여자보다는 운동에만 진심이다. 예쁜 여자랑 같이 먹는 팥빙수보다 혼자 먹는 닭가슴살이 훨씬 맛있다고 할 정도니까.         

 

 독서실에 돌아왔지만 다시 공부에 집중하기는 어려웠다. 미래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폰을 꺼내 들고 한참을 바라봤다. 미래와 나눴던 톡도 다시 한번 읽어봤다. 미래는 내게 한없이 고마운 사람인데... 난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어제 잘 쉬었어? 뭐해?”          

 고민 끝에 미래에게 톡을 보냈다. 독서실이라 폰을 무음모드로 해둬야 해서 한 번씩 답장이 왔나 폰을 확인했다.               


 5분, 10분, 30분, 1시간, 2시간... 미래는 답장이 없었다. 저녁을 먹고 집에 들어와서 샤워까지 했지만 미래는 답장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 톡을 읽지 않았다.   


 미래에게 연락이 차단됐다고 생각하니 씁쓸했다. 이모 탕수육도 다시는 먹을 수 없겠구나...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더니 내 배는 정직하게도 미래보다 탕수육을 먼저 떠올려줬다. 날 병원에 데려갈 줄 사람도,,, 인공눈물 챙겨줄 사람도, 따뜻하고 날카로운 조언을 해줄 사람도, 공부 잘할 수 있다고 격려해 줄 사람도... 이제는 없겠구나.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폰부터 확인했다.      


 “답이 너무 늦었지?! 나 가족 여행 왔는데 폰을 숙소에 두고 돌아다니는 바람에ㅠㅜ 너도 잘 쉬었어?”    

      

 미래는 정말 착한 여자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저 답장에서 나에 대한 어떤 불쾌함이나 거부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마지막 문장은 의문문이다. 다른 애들이라면 잘 자라고 마침표를 찍었을 법도 한데 미래는 내가 답장을 해야 하는 톡을 보냈다. 저게 미래의 진심이라면 정말 섬세한 배려다.     

     

 일요일도 독서실에 가서 하루 종일 공부했다. 미래와는 가끔씩 톡을 했다. 미래는 여행 중이었고 나는 공부 중이었으니까. 어젯밤 나의 모든 걱정은 이제 모두 쓸데없는 것이 되었다.   


 미래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낼 수 있었지만 문제는 라영이었다.     


 ***               


 월요일에 등교하자마자 내 엉성한 연기는 시작됐다.   


 “라영아! 왔어?”

 억양부터 틀려먹었다. 이런 간단한 인사조차 못하다니...


 “응. 잘 쉬었어?”

 반면에 라영이는 전과 똑같다. 라영이는 내 말에 영향을 안 받은 건가?          

      

전보다 공부는 훨씬 잘 됐다. 옆에 앉은 라영이를 의식해서인지 더 열심히 공부했다. 수업 시간에 한 번도 다른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공부만 했다. 이런 기분을 느껴본 것이 얼마만인지...


 하지만 애들이 내가 이렇게 쉽게 공부에만 집중하도록 둘리가 없다. 그 시작은 나라였다.


 “장유준! 너 목요일에 라영이 옆에 앉는 거야? 이거 뭐 겨울방학까지 둘이 계속 짝꿍인 건가?”      


 아! 맞다. 목요일은 짝꿍을 바꾸는 날이다. 이번에는 3월과 똑같이 남자들이 간다.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근데 정혁이는 효진이 옆에 앉을 것 같아? 어때? 너 베프니까 알 거 아냐!”

 나라의 목적은 이거였다. 정혁이가 누구 옆에 앉을지에 대한 정보를 내게 얻어내려는 것.


 “몰라. 원래 정혁이 그런 말 잘 안 하잖아.”

 지금 정혁이가 문제가 아니다. 내가 문제다. 하필 이번에는 남자가 가야 하는 달이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          


 “저녁에 이모 탕수육 먹으러 갈래?”

 난 어렵게 미래에게 말을 꺼냈다. 미래에게 사과하고 싶은 마음 절반과 이모 탕수육을 정말 먹고 싶은 마음 절반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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