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휴리릭 Sep 04. 2023

29화 - 진실게임은 원래 그런 거니까

첫사랑과 끝사랑 사이 어딘가(소설)

 “먼저 여자애들부터 시작하자! 근데 누구를 말하더라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갑자기 서로 어색해지지 말고! 그렇다고 아무도 없다고 하지도 말고! 다른 반에 가서 퍼뜨리지 말고! 여기 모인 우리끼리 정말 진실된 이야기를 하는 거야! 오케이?”     


 나라의 리더십은 오늘따라 더 빛나는 것 같다. 물론 이렇게 약속한다고 해도 어차피 소문은 금방 퍼지겠지만.          


 "진짜 마음에 있는 사람 솔직히 말하자! 우리끼리만 비밀로 소중히 간직하는 걸로!"     

 굳은 의지를 얼굴에 한가득 담은 규아였지만 나는 잘 안다.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먼저 규아가 다른 반에 진실게임의 결과를 이야기할 것이란 걸.     


 진실게임이 원래 그런 거니까. 내 마음을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내 마음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영영 모를 것 같으니까. 이런 자리를 빌려서라도 내 마음을 조금은 보여주고 싶은 거다.


 짝사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세상에 최애 아이돌 정도밖에 없다. 아이돌은 대부분 연애를 안 하기 때문에 짝사랑이 지켜질 수 있지만, 현실은 다르다.  내 짝사랑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할 수도 있다.      


 “자! 그럼 나부터 시작할게! 나는 정혁이! 정혁이가 우리 반에서, 아니 우리 학교에서 제일 멋있는 것 같아! 좋아한다기보다는 호감 정도로 해두자!”     


 나라의 온몸에서 쿨한 냄새가 진동한다. 진심을 보여주는 척하면서 본인의 자존감도 지키는 전략을 썼다. 시작부터 이렇게 화끈하게 말해버리니 그다음 사람이 부담될 것 같다.    

  

 하지만 정작 정혁이는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시작부터 1표 받았으면 산뜻한 출발을 자축할 법도 한데... 정혁이는 나라에게 전혀 마음이 없는 건가..?     


 “난 솔직히 우리 반에는 없고 학교에서는 1반 동북이가 제일 좋다. 다들 동북이가 누군지 알지? 얼굴 좀 까맣고 몸 좋은 애! 나 동북이랑 잘되게 너네들이 좀 밀어주라.”    

 

 그래, 규아는 원래 남사친들 어장관리를 열심히 하면서도 동북바라기이기도 했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반에서 규아를 도와줄 만한 사람은 나라 정도밖에 없을 것 같다. 나도 1반은 축구할 때 빼고는 갈 일이 없으니까.     


 나라부터 시작해서 다들 거침없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말하기 시작했다. 응..? 근데 뭔가 좀 이상한데..? 아직까지 내 이름이 한 번도 안 나왔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최고의 인기남 장유준이 이럴 수가 없는데... 내가 많이 취했나?     

     

 이번에는 효진이 차례다.     


 “나는 정혁이가 좋아. 정혁아 저번에 고마웠어.”    

 

 여자 애들이 잠깐 술렁거린다. 나도 사실 놀랐다. 효진이가 저렇게 대놓고 정혁이를 말할 줄은 몰랐다. 나는 정혁이와 효진이가 사촌 관계고 한 집에 살고 있다는 걸 알지만, 다른 애들은 전혀 모를 테니까.      


 효진이는 다시 우리 반의 일원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바이올린 사건은 너무 충격적이었지만, 어쨌든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고 우리의 기억 속에 많이 잊혔다.      


 효진이의 상황과 성격상 지금 누구를 좋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이런 진실게임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분위기에 바로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 효진이도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효진이는 괜히 다른 남자를 말했다가 서로 곤란해지는 것보다는 안전한 방법을 택한 것 같다. 정혁이라는 가장 안전한 방법을.


 정혁이는 벌써 5표를 받았다. 나라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내 표정도 어두워진다. 정혁이와 1,2등을 다툴 거라 생각했는데 아예 상대가 안 되고 있다.  


 미래의 순서가 되었다.      


 “나는... 진짜 없어. 솔직히 너네들 포함해서 또래 애들은 다 남자로 안 보여. 미안.”     

 아..? 난 남자로 안 보이는 거였구나.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지만 괜히 서운하다.  

        

 “그래도 제일 괜찮은 사람 한 명은 말해봐. 이게 오늘 진실게임 원칙이야!”

 효진이 때문에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은 나라가 이 게임의 원칙을 다시 한번 큰 목소리로 설명해 준다.          


 “뭐 굳이 한 명을 뽑자면... 유준이가 제일 괜찮긴 하지.”

 모든 시선이 내게로 몰린다. 안 그래도 술기운 때문에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열이 더 오른다.      


 미래야! 고마워! 그래도 일단 0표는 면했구나.     


 붉어진 내 얼굴을 애써 감추며 미래를 슬며시 바라봤다. 미래는 쿨한 건지 아니면 나를 피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미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다. 미래가 효석이가 아닌 내 이름을 불러줘서 기분은 좋다.        


 이제 마지막이다. 마지막은 라영이다.     


 “라영이는 진짜 궁금하긴 하다. 그래서 라영이는 누구야?”    


 나라의 질문에 라영이는 살짝 미소를 보였다.

     

 라영이는 장기자랑 때의 화려한 모습은 사라지고 어느새 평상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입고 있는 검은색 츄리닝과 대비되는 맑은 얼굴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라영이의 수줍은 미소 때문인지, 청청 패션도 소화해 내는 라영이의 비주얼 때문인지, 날 사로잡았던 몽환적인 목소리와 화려한 댄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내 심장은 내 생애 최고 스피드로 뛰고 있었다.    

 

 “아... 나는... 나도 유준이.”     

 라영이의 짧고 강렬한 대답은 내 심장을 관통했다.   

        

 “오! 뭐냐 장유준! 갑자기 몰표다!”

 한 표도 못 받은 영만이가 열받는다는 목소리로 외쳤다.

         

 기분이 좋은데 뭔가 머리가 잘 안 굴러간다. 그리고 미친 듯이 졸려온다. 어제 잠을 늦게 자긴 했어도 이렇게 빨리 졸릴 리가 없는데... 내 몸은 정말 술과 안 맞나 보다.      

  

 내 심장은 이미 임계치를 넘어 사망 수준에 이르고 있었지만 냉정한 나라가 이런 것 따위를 배려해 줄리 없었다. 갑자기 받은 2표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나라는 이미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다.


 “자! 이번에는 남자들 차례다! 3명밖에 안 되니까 빨리빨리 하자! 영만이 너부터 빨리 말해봐!”

 자신의 이름이 한 번도 안 나와서인지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영만이가 입을 뗀다.  

   

 “나는 나라. 나라야 미안하다.”

 “뭐가 미안해. 좋아해 줘서 고마운 거지. 땡큐!”     


 나라는 나중에 정치를 한 번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정혁이 차례다. 가장 절친인 나조차도 정혁이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모른다. 그런 정혁이가 과연 이야기를 할까? 나도 너무 궁금하다.     


 “나는 그냥 술 마시면 안 될까?”

 “고등학생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어차피 술도 없어. 빨리 말해!”    

 

 갑자기 영만이가 흥분했다. 술도 안 마신 놈이 대체 무슨 객기란 말인가. 정혁이가 손가락으로 싸워도 영만이는 이길 것 같은데.

         

 “그래. 빨리 말해봐. 무조건 말하는 걸로 약속했잖아.”

 나라가 긴장과 설렘을 동시에 담아 다시 한번 게임의 룰을 강조한다.     


 “아... 나는... 음. 효진이가 그래도 제일 괜찮은 것 같아.”     


 와... 결국 정혁이도 효진이와 마찬가지로 안전한 방법을 택했다. 그래도 효진이를 말할 줄이야. 정혁이는 여전히 효진이를 지키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해두면 효진이를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규아 입을 통해 소문은 금방 전교에 퍼질 거고 전교생 누구도 효진이에게 시비를 걸 수 없을 테니까. 전교 싸움 짱이 좋아하는 여자라는 타이틀은 효진이에게 엄청난 방어막이자 힘이 될 것이다.     


 그래, 정혁이가 여자에게 관심이 있을 리가 없지... 닭가슴살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나라는 정말 화가 잔뜩 난 것 같은 표정이다. 만약 소주가 남아 있었다면 1병을 그대로 원샷하고도 남을 만큼.    


 “이제 마지막이네. 장유준! 이제 너만 말하면 된다!”     


 나라는 예비 정치인답게 표정과 감정을 무너뜨리지 않고 침착하게 내게 말했다. 드디어 나구나... 근데 아직도 어지럽다. 술이란 놈이 정말 무서운 것 같다.    

     

 “나는..”

 “너 미래 좋아하는 거 아닌가?”    

 

 규아가 내 말을 잘라먹었다.     

 

 “미래? 미래 좋아해. 미래는 진짜 100점이야.”

 규아의 질문에 내 말은 뇌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나와 버렸다.  


 “우얼. 대박! 100점이란다. 누가 공부충 아니랄까 봐 점수를 매기고 난리야.”

 내가 원래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규아 때문에 말이 방향을 잃었다. 술기운 때문에 맨 정신을 유지하기 어렵다. 후... 근데 계속 졸리다.   

       

 “그러면 라영이는? 라영이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라영이는 몇 점인데?”     

 누가 물어봤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술기운에 잠식당한 내 머리는 생각 대신 본능에 충실한 대답을 해버렸다.  

    

 “라영이는...”

매거진의 이전글 28화 - 일탈을 시작하기 매우 적절한 시간이 되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