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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리릭 Aug 31. 2023

28화 - 일탈을 시작하기 매우 적절한 시간이 되었다

첫사랑과 끝사랑 사이 어딘가(소설)

 밤 9시. 일탈을 시작하기에 매우 적절한 시간이다. 정찰대에 따르면 선생님들은 이미 그들만의 세계에 들어간 것 같다. 선생님들도 오랜만에 자유로운 분위기에 술 한 잔씩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정말 예상했던 대로 정확히 병달이가 가방에서 술을 꺼냈다. 소주 2병이다. 대체 어떻게 구했을까 싶다가도 저 얼굴이라면 내가 가게 사장이라도 신분증 확인 안 하고 술을 팔았을 것 같기도 하다. 정의의 사도인 정혁이도 오늘만큼은 별로 관심이 없다. 다른 반 병달이 패거리들이 우리 숙소로 몰려온다. 정혁이의 표정이 안 좋아졌지만 혹시 다른 애들 방해하면 그때 나서도 괜찮다고 내가 말렸다.     


 몇 명은 이미 숙소 밖으로 나간 것 같다. 아마 PC방이라도 가지 않았을까 싶다. 낯선 동네지만 남자 여러 명이 뭉쳐 다닐 테니 무서울 일은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이곳 주민들이 무섭겠지.    

  

 나는 정혁이와 영만이랑 모여 있었다.


 “야! 이제 뭐 할 거야? 이대로 자기는 너무 아쉬운데. 뭐 재밌는 거 없나?”

 얼굴에서 재미라고는 1도 찾아보기 어려운 정혁이를 뒤로 하고 영만이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지. 이대로 밤을 날릴 수는 없지. 음... 우리 여자 방에 쳐들어가자!”

 “오! 좋은데? 유준이 네가 앞장서는 거지?”

 정말 영만이스러운 대답이다. 이런 용기 없는 놈 같으니라고.


 “정혁아 너도 갈 거지?”

 “근데 여자들 방에 가도 괜찮은 거야? 욕먹을 것 같은데...”

 정혁이가 욕먹을 걸 걱정하다니... 정혁이도 가고 싶긴 한가 보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마! 내가 이미 판을 다 깔아 뒀지! 잘 따라오기나 하셔!”     

 이런 은밀한 작전은 사람이 많아져서는 곤란하다. 우리 셋은 다른 남자 애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방을 나왔다.


 우리 반 여자애들 방은 1층 가장 안쪽 방이다. 거기까지 가는 길에 다른 반 여자애들을 마주칠 가능성이 높지만 매우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괜찮다. 이걸 위해 아까 편의점에서 미리 음료수랑 먹을 걸 사뒀다. 이렇게 먹을 걸 들고 가면 다른 반 애들은 심부름 가는 걸로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내가 이렇게 자신감 있어하는 건 미리 나라와 연락을 했기 때문이다. 나라가 이미 세팅을 완료했다는 연락을 받고 방을 나섰다. 우리 반 여자애들 중 5명은 이런저런 이유로 방에 없고 나머지는 다 찬성했다고 한다. 분명 그다지 원하지 않는 애도 있었을 텐데 나라가 설득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반 남자 외모 1,2등이 가는데 싫어하진 않겠지 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아, 영만이는 몇 등인지 모르겠다. 나랑 정혁이 중에 누가 1등 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오늘 1등이 결정될지도 모를 일이고...     


 똑.똑.


 요란한 각 방의 소음은 내 노크소리를 잡아먹은 듯했다. 그래서 조금 더 과감하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나라가 웃으며 문을 열어줬다.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신나고 설렜는데 막상 여자 방에 들어가려니 생각보다 긴장됐다.      


 헉.


 여자 애들은 이미 방 세팅을 완료해 둔 상황이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각종 과자와 초콜릿이 펼쳐져 있었다. 게다가 치킨까지 있었다. 치킨은 어떻게 있는 거지..? 그리고 그걸 중심으로 여자 애들이 원을 만들어서 앉아 있었다. 우리 3명의 자리만을 남겨놓고.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나라가 싱글싱글 웃으며 물었다. 아마 정혁이가 왔기 때문일 것이다.


 “아... 우리도 씻고 이것저것 정리도 하고 빠져나오는 타이밍도 보느라.”

 말하고 나니 참 길게도 설명했구나 싶었다.     


 자리에 앉으니 우리 반 여자애들 얼굴이 하나하나 보였다. 우릴 초대해 준 나라부터 규아까지. 라영이도 있었다. 미래도 있었고. 효진이가 있는 건 조금 의외였다. 그 사건 이후로 조용히 지내는 것 같았는데 다행히 여자애들 사이에서 왕따까지는 아닌가 보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잠깐만!”

 나라는 냉장고까지 쪼르르 달려가더니 냉장고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소주 4병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 정도면 그래도 분위기는 좀 나겠지?”

분명 소지품 검사도 했을 텐데 대체 이걸 어떻게 가져온 거지... 나라도 정말 못하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야! 술을 꼭 들고 올 필요가 있겠어? 배달시키면 되잖아! 뭐 하러 무겁게 들고 와. 이 치킨과 함께 오는 아름다운 배달이야”

 나라는 내 궁금증을 듣기라도 한 듯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그러고 보니 치킨은 대체 어떻게 여기에 있나 신기하긴 했었다.     


 “근데 안타깝게도 많이는 못 시켰어. 한 명당 한잔씩 채우기도 버거운 양이지만 그래도 수련회니까 이렇게라도 기분 내자고!”     


 한 명씩 종이컵을 돌렸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모두 다 술을 마시는 것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암산을 잘하는 내 머리는 놓인 술의 양과 우리들의 인원수로 계산했을 때, 두당 70ml 정도밖에 안 되는 양이라는 걸 바로 파악했다. 그 정도면 우리가 먹는 요구르트 1병 수준이다. 문제는 나는 태어나서 아직 한 번도 술을 안 마셔봤다는 거다.      


 “정혁아! 너 술 마셔본 적 있어?”


 애들이 잔을 채우느라 시끄러운 틈을 타서 조용히 정혁이에게 물었다. 정혁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만이에게도 물어보려는 찰나 영만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난 독실한 신자라서 술은 안 먹을래.”

 굳건한 표정의 영만이는 꽤 큰 목소리로 말했지만 아무도 영만이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잔 다 채웠지? 이제 짠 하자! 건배사는 뭘로 하지?”

 “건배사 괜찮은 것 만들어보자... 2학년 4반이니까 24 들어가는 걸로 해보면 어때?”

 “오, 그거 좋다!”    

 

 “이리 와!

  사랑해!”


 나라가 건배사의 시작을 알렸다. 그윽한 눈으로 정혁이를 쳐다보면서. 아직 맨 정신일 텐데 저런 걸 할 수 있는 나라의 멘탈도 알아줘야 한다.     


 “이상하게 생겼네!

  사진 속 영만이 얼굴!”


 내 건배사에 애들은 빵 터졌고 영만이는 혼자 또 화가 났다. 내 절친이지만 골려 먹는 재미가 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 너를”


 정말 영만이도 한결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 애들만 없었으면 정혁이랑 양쪽에서 영만이를 한 대씩 갈겼을 거다.     


 “이만하면 됐다! 마! 잡담 그만하고

  싸그리 먹어치우자 마!"


 부산이 고향인 은아가 모처럼 사투리로 건배사를 외치며 술잔을 들어 올리자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으악! 소주의 첫맛은 알코올 그 자체였다. 그 옛날 과학실에서 봤던 알코올램프 속 알코올을 마셔본 적은 없지만 그 맛은 딱 이럴 것 같았다. 도무지 안 될 것 같아 입만 대고 내려놓으려는데... 이 분위기 뭐지... 모두 자신의 종이컵을 다 비우고 있었다. 정혁이는 1등으로 비웠고, 나라도, 규아도 원샷이었다. 규아는 아쉬운지 종이컵 바닥까지 핥아먹을 기세였다. 미래도 살짝 인상을 쓰면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셨다. 나와 라영이만 남은 것 같았는데 라영이가 나보다 먼저 종이컵을 비웠다.      


 정말 맛은 없었지만 이런 자리에서 나만 빠질 수는 없다. 자존심이 있지... 한 번에 마시면 좀 낫겠지 하는 생각으로 꿀꺽 넘겨버렸다. 그리고 내 목구멍이 타는 기분을 느꼈다. 으악! 다시 한번 속으로 크게 소리쳤다.     

 원샷이 끝나고 이후 건배사부터 우리는 소주 대신 탄산수를 마셨다. 소주가 조금 남아 있는 잔에 탄산수를 넣으니 소맥 느낌이 나는 것 같다고 누군가 말했다.     


 오늘 장기자랑 이야기부터 학교 전반에 관한 이야기들이 마구 쏟아졌다. 나는 살짝 어지럽기 시작해서 친구들 말을 듣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 무렵, 나라가 마이크를 들었다. 마이크라고 해봤자 소주병에 숟가락을 넣은 것이긴 하지만.      


 “야! 우리 이제 진실게임 한 번 해야지! 어때? 콜?”


 응? 진실게임? 지금까지 충분히 진실된 이야기를 나눈 것 아니었나... 진실게임이 그게 아닌가... 첫 잔을 원샷 한 이후로 술을 한 모금도 안 마셨지만, 내 취기는 점점 올라오고 있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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