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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리릭 Aug 29. 2023

27화 - Dreams Come True

 “이따 저녁에 뭐 하냐? 뭐 재밌는 거 없나?”

 영만이가 매우 궁금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아무래도 반장인 나는 뭐라도 알고 있을 것 같았나 보다.


 “글쎄? 그래도 게임이나 장기자랑 같은 거 하지 않겠어?”

 “그러려나? 나라가 춤 제대로 준비한 것 같던데 장기자랑 안 하면 큰 일 나긴 하겠다.”


 그새를 못 참고 구석에서 카드 도박을 시작한 병달이 무리들을 제외하고 우리 남자들은 과연 이번 수련회에는 누가 화려한 변신을 할지, 어떤 아이돌 노래를 커버할지 같은 것이었다. 고된 고등학교 생활에 여자아이돌은 축구만큼이나 소중한 존재였으니까.


 레크리에이션은 초반부터 재미가 없었다. 사회자는 그 어떤 기준도 없이 점수를 마구 뿌리기 시작했다. 사회자는 처음에 10점씩 주던 점수를 10분도 안 돼서 3,000점씩 뿌리고 있었다. 심지어 누가 예뻐서 점수를 더 준다는 듯 저급한 멘트도 시도 때도 없이 나왔다. 저런 이상한 강사 섭외할 돈으로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줄 것이지...


 지루하던 게임이 끝나고 드디어 반별 장기자랑 시간이 왔다.


 사실 우리 외가로 말할 것 같으면 대대로 흥이 넘치는 집안이다. 어렸을 때부터 외할아버지 댁에 가면 음악이 항상 가득했다. 전국노래자랑을 하는 시간에는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무조건 TV를 봐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시끄럽게 하면 외할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졌기에 나는 잠시 밖으로 대피하고는 했었다. 큰삼촌은 회사 노래자랑 대회에서 10년째 우승하고 있었고, 막내삼촌은 매달 300원 정도 저작권료가 나온다며 자작곡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안타깝게도 엄마는 외가의 우수한 유전자를 전혀 물려받지 못해서 음치 수준에 가까웠지만 다행히 내게는 외가 쪽 피가 많이 흐르고 있었다. 압도적인 노래 실력까지는 아니지만, 변성기 가득한 남자애들 속에서 맑은 내 고음은 내 외모만큼이나 돋보인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수련회는 중요했다. 얼굴이 아닌 노래로도 어필할 수 있는 시간이니까.


 장기자랑은 흥미진진했다. 분명 중간고사 끝나고 급하게 연습했을 텐데 나름 수준 높은 장기자랑이 이어졌다. 물론 3반의 경민이가 했던 차력쇼는 정말 토 나올 뻔했다. 왜 굳이 엉덩이를 보여주려 하는 건지... 사회자도 그건 못 참겠는지 얼른 중단시켜서 다행이었다.     


 드디어 우리 반 차례다.      


 예상대로 나라가 선봉장에 나섰다. 작년 축제 때도 나라의 아이돌 댄스에 남자애들이 입이 떡 벌어졌던 기억이 난다. 올해는 얼마나 대단한 무대를 준비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그나저나 누구랑 같이 추려나?’


 나라의 춤 실력은 모두가 잘 안다. 다만 나라는 절대 솔로로 춤을 추지 않았다. 항상 걸그룹을 커버했고 인원수도 커버하는 걸그룹과 똑같이 맞췄다.    

  

 나라의 뒤를 규아가 따라간다. 오! 저렇게 2명인가? 근데... 2명인 걸그룹은 없었던 것 같은데.      

 “Funny how all dreams come true~”


 전설적인 노래로 불리는 SES의 ‘Dreams Come True’가 흘러나온다. SES 멤버는 총 3명이었는데... 나라와 규아,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누구일까...?    

 

 선글라스와 모자를 쓰고 센터로 등장한 그 나머지 한 명은 라이브로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 시작과 함께 곳곳에서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음색 자체가 이 세상 것이 아니었다. 몽환적이면서도 우아한 목소리가 우리를 꿈의 세계로 빠져들게 만들고 있었다. 나를 지켜줄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저런 음색을 가진 애가 우리 반에 있었다고...? 우리 반이 아닌가...?’


 반장으로서 우리 반을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저런 애를 본 적이 없었다. 누군지 미친 듯이 궁금했지만 모자와 선글라스를 눌러써서 애초에 얼굴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조명은 반사되고 춤까지 추고 있으니 정말 알아차리기가 어려웠다.


 이제 나도 무대를 준비해야 한다.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다듬고 머리도 한 번 더 만져야 한다. 이 대단한 무대를 끝까지 지켜보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내 무대다.


 정혁이와 무대 뒤에서 우리 노래를 준비하고 있을 때 갑자기 엄청나게 큰 환호성이 들려왔다. 보아하니 아까 그 한 명이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어던진 것 같았다. 대체 누구길래...? 너무 궁금했지만 무대로 나가서 얼굴을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저 뒷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 특히 모자를 벗고 머리를 풀어놓으니 저 모습은 내가 아침에 반했던 그 모습이 분명하다.


설마 김라영?! 라영이라니...


 충격이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것 같던 라영이가 저렇게 화려한 무대를 만들 줄이야... 어쩐지 음색이 정말 좋다고 생각했다. 시를 낭송할 때의 목소리도 아름다웠지만,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는 맑고 청아했다.     


 “Dreams Come True.”


 무대는 끝이 났다. 이미 열광의 도가니다. 라영이의 음색과 나라의 춤선, 규아의 애교라면 우리 학교 남자들의 마음을 녹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라영이의 존재가 전교에 더 알려지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이제는 내 차례다. 후...      


 오늘을 위해 어제 노래방에서 열심히도 연습했다. 정혁이는 생긴 것과 매우 어울리게 랩에 특화된 친구다. 정혁이는 특유의 저음 때문에 웬만한 노래는 초반 도입부 외에는 더 많이 부르지 못한다. 하지만 랩에서는 다르다. 정혁이의 저음은 랩에 완벽하게 스며든다. 정혁이의 넓은 어깨와 터질듯한 근육은 랩을 한 손 위에 올려놓고 가지고 놀기 충분하다.


 반면 나는 반대다. 난 저음은 어렵지만 고음을 편하게 낼 수 있다. 변성기가 아직 찾아오지 않은 덕분에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다른 남자애들보다 훨씬 더 높은음을 음이탈 없이 낼 수 있다.

    

 이런 완벽한 조합이지만 무슨 노래를 부를지에 관해서는 논쟁이 있었다. 나는 아이돌 노래를 하고 싶었다. 2명밖에 안 돼서 BTS까지는 무리지만 그래도 괜찮은 보이그룹을 커버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혁이는 강렬하게 저항했다. 본인은 절대 춤을 출 수 없다고 했다. 내가 부탁해서 무대는 설 수 있지만 몸을 움직이게 된다면 무대를 거절한다고 했다. 팔씨름부터 벤치프레스까지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하는 친구지만 춤은 안 되나 보다. 이럴 때 보면 신은 공평하다.   

   

 같이 노래방에 간 영만이가 중재해 준 끝에 노래는 ‘Ring my Bell’로 정했다. 다이나믹 듀오의 랩과 나얼의 고음이 함께 들어 있는 노래로 우리에게 딱이다. 하지만 곡 선택에 있어서는 한 번 더 갈등이 있었다. 사실 나는 춤이 들어가는 신나는 노래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혁이는 여전히 춤을 강력하게 거부했고, 결국 우리는 이 노래로 타협했다.  

   

 “Ring my Bell~ Ring my Bell~”


 나의 고음과 함께 노래는 시작됐다. 춤을 못 추겠다던 정혁이는 이미 노래와 한 몸이 되었고, 모든 학생들은 일어나서 뛰기 시작했다. 랩에 취한 정혁이가 상의를 벗어던졌을 때 여자들은 거의 울부짖는 지경이었다.


 노래를 부르며 내 눈에는 한 여자만 보였다. 작년 수련회에서 그녀를 처음 알게 됐는데 올해 수련회에서 내가 그녀를 보고 있다. 전혀 몰랐던 그녀가 이제는 내 짝꿍이 되었다. 노래 가사처럼 내 전화를 울려줄 사람이 그녀이기를 바라게 되었다.    

 

 장기자랑 무대가 모두 끝났다. 예상대로 1등은 SES가 받았다. 상품으로 한 명당 문화상품권 10만 원씩을 준다고 한다. 수련회 참가비의 2배에 가까운 액수다. 하지만 모두가 인정하는 1등이었기에 다들 진심으로 축하의 박수를 보내줬다. 나도 뜨거운 박수를 쳤다. 1등을 받은 사람은 3명이었지만 내 눈은 한 사람만을 보며 박수를 쳤다.     



 수련회의 꽃은 당연히 밤이다. 밤은 온전히 우리들만의 시간이다. 물론 사전에 가방 검색이란 걸 했다. 술, 담배 같이 우리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될 물건들을 검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담배를, 또 누군가는 술을 안 들키게 가져왔을 거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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