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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리릭 Aug 25. 2023

26화 - 버스에서도 옆에 앉고 싶었다

 정혁이는 면바지에 후드티 하나를 걸치고 왔는데, 키와 넓은 어깨가 받쳐주니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 아닌 몸매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혁이가 입은 후드티는 이태원이 아니면 사기 어려운 사이즈 같아 보였다. 나는 평범하게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었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 패션에 별로 신경을 안 썼는데, 너무 대충 하고 왔나 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다.    

  

 짝꿍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오늘 버스 탈 때 누구 옆자리에 앉아서 갈지 어제부터 고민이었다. 교실에서 짝꿍 그대로 앉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앉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난 영만이나 정혁이 옆에 앉으면 되긴 하겠지만 수련회 가는데 굳이 영만이 옆에 앉고 싶진 않다. 그렇다고 라영이 옆에 앉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다른 친구들은 다 동성끼리 앉아서 가는데 나만 라영이 옆에 앉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결국 고민을 해결하지 못한 채 잠이 들었고 아침 등굣길에 나라를 만났다. 혹시 나라는 어떤 생각이 있을까 싶어서 물어봤다.


 “나라야! 너 근데 오늘 버스 탈 때 누구 옆자리에 앉을 거야?”

 “나? 글쎄? 내 옆자리에 앉겠다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나라는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아? 혹시 너도 내 옆에 앉고 싶은 거야? 라영이 옆이 아니고?”

 나라 특유의 뻔뻔함도 여전하다.


 “라영이 옆에 앉고 싶지. 근데 버스는 교실이 아니잖아. 동성끼리 앉지 않겠어?”

 “하긴. 보통 친한 친구끼리 앉아서 가지. 친한 친구는 대부분 동성일 거고.”


 나라는 잠깐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곧바로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우리 반은 바꾸면 되지 않겠어?”

 “가능할까? 넌 누구랑 앉고 싶은데?”

 “당연히 정혁이지! 그래! 생각을 해보자. 정혁이 옆에 앉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나라는 갑자기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했다.


 “음... 어떤 방법이 좋을까... 나는 정혁이랑 앉고 싶고 너는 라영이랑 앉고 싶단 말이지. 그러면 나, 너, 라영이, 정혁이... 이렇게 총 4명이니깐... 그래!”

 “뭔데? 좋은 방법이 있어?”


 나라는 승리한 미소를 얼굴에 가득 담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럼! 우리 4명이 맨 뒤에 앉으면 되지 않겠어? 그러면 간단하잖아?”

 아직 잘 이해가 되지 않은 나는 나라를 계속 바라봤다.     


 “라영, 나, 너, 정혁 이렇게 앉으면 되겠다! 아니지! 그러면 내가 정혁이 옆에 앉는 게 아니잖아!”

 “그러면 다른 방법이 있나...”

 “일단 맨 뒤에 우리 4명이 앉자. 그러고 나서는 내가 해결할 수 있어!”


 이렇게 말하고는 나라는 나를 앞질러 가버렸다. 무슨 방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 우리 4명이라도 한 줄에 앉는다는 생각을 하니 또 설렜다.


 난 정혁이에게 가서 네 몸은 너무 거대해서 아무 자리에나 앉으면 옆 사람에게 민폐일 테니 나와 함께 맨 뒷자리에 앉자고 했다. 정혁이는 원래 이런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순순히 내 말을 따라줬다. 나라가 라영이를 어떻게 설득했는지 모르겠지만, 라영이도 맨 뒷줄에 앉았다.


 나라와 나의 계획대로 우리 4명은 맨 뒷줄에 앉게 됐다. 버스 기준 왼쪽부터 정혁, 나, 나라, 라영 이렇게 앉았다. 마지막 한 자리는 가방을 쌓아둬서 아무도 앉을 수 없게 만들어뒀고. 이제 구조상 나와 나라만 자리를 바꾸면 나와 나라가 원하는 대로 앉을 수 있었다.


 출발한 지 10분 정도 됐을 무렵 나라는 자연스럽게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양쪽 끝에 앉은 라영이와 정혁이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유준아. 근데 나 조금 불안하다.”

 “응? 뭐가?”


 나라가 무슨 말을 할지 몰랐지만 난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기를 해야 했다.


 “내 앞이 뻥 뚫려있어서 몸이 앞으로 튕겨져 나갈 것 같아...”    

 

 ‘그러면 안전벨트를 하면 되잖아.’라는 말이 나올 뻔했지만 겨우 참아냈다. 지금 나는 나라와 긴밀한 협조를 해야 한다.     


 “그러면 내가 자리를 바꿔줄까? 난 벨트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해주면 고맙지!”     


 우리는 어색한 연기를 빨리 감추기라도 하듯이 서둘러 자리를 바꿨다. 이제 자리는 버스 기준 왼쪽부터 정혁, 나라, 나, 라영이가 됐다. 나라는 정혁이 옆에 앉게 됐고, 나는 라영이 옆에 앉게 된 거다.      


 ‘해냈어!’


 우리가 자리를 바꾼 것에 관심도 없어하는 정혁이와 슬며시 웃는 라영이를 양 옆으로 하고 버스는 계속 열심히 달렸다.     


 항상 말도 말이 많던 나라는 자리를 바꾸더니 갑자기 정숙 모드로 바뀌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정혁이가 어느새 눈을 감아버렸기 때문이리라. 나 역시 막상 라영이 옆에 앉으니 말이 나오질 않았다. 머리끈을 풀고 청색 재킷을 입은 라영이는 교실에서보다 훨씬 더 예뻐 보였다. 어제 무리한 일정으로 놀아서인지 그런 라영이를 슬쩍 보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유준아 일어나~ 다 왔어!”


 달콤한 목소리에 눈을 떠보니 내 머리는 어느새 라영이 쪽을 향해 있었다. 내 머리카락을 슬쩍 만지며 날 깨우는 라영이의 손길에 정신이 반짝 들었다.    

 

 학교 급식보다 더 별로인 점심을 먹고 나서 오후에는 지루하고 짜증 나는 일정들이 이어졌다. 우리는 어깨동무를 하고 하나에 ‘정신’을 외치며 앉고 둘에 ‘통일’을 외치며 일어나야 했다.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 것 같은 조교들은 교관이라고 적힌 모자가 무슨 대단한 권력이라도 되는 듯 우리를 괴롭히며 희열을 느끼는 것 같았다. 우리가 돈을 내고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 도무지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 시간에 선생님들은 다들 어디로 갖는지 코빼기도 비추질 않았다.      


 하지만 이걸 참아야만 짜릿한 저녁이 찾아오기에 어쩔 수 없었다. 문제는 자꾸 훼방을 놓는 녀석들이 있었다는 거다. 팔 벌려 뛰기 마지막에 구령을 넣지 말라는 미션은 사실 쉬운 거다. 조교가 처음에 50개로 시작하고 끝내려 했지만 마지막에 구령을 넣는 놈은 꼭 있었다. 분명 일부러 그런 놈도 있었을 것이다. 조교들은 처음에는 그럴 줄 알았어라는 표정으로 자연스럽게 50개를 다시 하라고 외쳤다. 하지만 우리는 점점 지쳐갔고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들보다 상대적으로 체력이 약한 여자들은 더 힘들어했다. 하지만 내가 주의 깊게 보고 있던 라영이는 지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나보다 힘이 넘쳐 보였다. 몸은 가냘파 보이는데 어디서 저런 체력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키가 크고 팔이 길어서 동작을 한 번 할 때마다 역동적으로 보이는 미래 역시 처음과 다름없는 자세로 뛰고 있었다. 의외로 가장 지친 애는 나라였다. 정혁이 옆에 앉아 오면서 긴장을 해서 그럴까... 아니면 그저 입만 강하고 몸은 약한 것일까... 나라의 팔은 펭귄보다 조금 더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모두가 조금씩 지쳐가자 목소리는 힘을 잃어갔다. 한 반에 5명 정도만 소리를 제대로 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5명 중에서도 실수를 하는 애들은 나왔다. 심지어 정효석마저 실수를 했다.


 누적 300개쯤 했을 때 조교는 결국 10개만 하자고 했지만 그마저도 성공시키지 못했다. 10개를 10번쯤 했을 때 마지막에 누가 분명 “십”을 외쳤지만 조교는 못 들은 척했다.    

 

 “여러분! 고생했어요! 보세요! 하니까 되잖아요?”


 말하는 조교도 민망했을 것이다. 실패했다는 걸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팔 벌려 뛰기를 300개 정도 한 우리는 이미 반 기절 상태에 있었기에 끝났다는 행복에, 이제 드디어 저녁을 먹고 즐거운 시간이 온다는 생각에 조교의 거짓말을 모른 척 넘어가주기로 했다.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샤워부터 했다. 샤워기는 총 5개가 있었지만 우리 남자들은 한 번에 모두 샤워장에 들어갔다. 한 명이 몸에 물을 묻힐 때 한 명은 옆에서 비누칠을 했다. 그러다 누가 시작했는지 비눗물이 공중을 날아다니기 시작했고 우리들은 한바탕 전쟁을 했다. 남자들은 운동하고 사우나 가면 절친이 된다더니 딱 그런 기분이었다.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병달이도 이때만큼은 친구처럼 보였으니까. 아, 근데 한 명은 샤워장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로 정효석. 샤워는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치고 잠자기 직전에 해야만 한다며 책을 꺼내 읽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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